[O2/이슈]값싸고… 구입 쉽고… 시들어가는 ‘담배 공화국’ 아이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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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 안 받아… 대낮 길거리서 뻑뻑
■ 청소년 흡연 얼마나 심각한가

사진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그래픽 박경옥 디자이너 youth@donga.com
사진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그래픽 박경옥 디자이너 youth@donga.com
‘이 나라에서는 담배 피우는 습관이 매우 성행해서 4∼5세 되는 아이들도 담배를 피우며, 지금도 남자건 여자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드뭅니다.’(하멜 표류기)

역사는 역시 돌고 도는 것인가. 청소년 흡연율이 계속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데다, 최근에는 길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이 늘면서 곤혹스러워하는 어른이 많아지고 있다.

토요일인 1일 오후 3시경, 서울 광진구 구의동 올림픽대교 북단에서 테크노마트로 가는 길. 중3이나 고1 정도 되어 보이는 남학생 둘이 작은 종이상자로 장난을 치며 다가온다. 두 아이의 손을 오가는 것은 하얀 담뱃갑. 조금 더 걸어가자 편의점 근처에서 침을 뱉으며 담배를 피우는 ‘청년’ 둘이 보인다. 불량해 보이는 태도로 나이가 많은 듯 허세를 부리지만 영락없는 고등학생이다. 아이들은 백주대낮에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 쳐다보는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1980년대 기자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기자는 뭐라고 한마디하려다 당장 그만뒀다. 얼마 전 담배 피우는 청소년들을 훈계하다 시비에 휘말려 숨졌다는 한 가장의 얘기가 생각나서였다.

요즘 학생들은 담배를 얼마나 피울까. 공식 통계자료(청소년 건강 행태 온라인 조사)에 따르면 중학생의 흡연율은 8.1%, 고등학생은 16.1%다. 남학생의 흡연율은 중학교 11%, 고등학교 23.1%. 그런데 현장에서 청소년 흡연을 접하는 사람들은 실제 수치가 훨씬 높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복근 청소년흡연음주예방협회 사무총장은 “실제 고교생의 흡연율은 30% 이상일 것”이라며 “한국 청소년의 실제 흡연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상위권에 속한다”고 말했다. 특히 선진국의 청소년 흡연율은 매년 낮아지고 있지만, 국내 청소년의 흡연율은 그다지 변동이 없다는 게 문제다.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예전에는 ‘음지’에서 이뤄지던 청소년 흡연이 점점 공공연하게 이뤄진다는 점이다. 아파트 단지나 주택가마다 떼를 지어 아무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워 대는 중고생들 때문에 민원이 넘쳐 난다. 기자 주변에서도 어린이 놀이터 옆 벤치에서 10여 명이 계속해서 담배를 피운다거나, 아파트 단지 안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등교하는 모습이 매일 보인다는 등의 ‘풍부한’ 증언이 있었다.

청소년들은 이런 공개 흡연을 ‘길담(길에서 담배 피우기)’이라고 한다. 청소년 유해 환경 실태 조사 등에 따르면 1990년대 야산이나 으슥한 골목이던 청소년의 흡연 장소가 2000년대 들어서는 대로변이나 도심 공원으로 옮겨졌다.

○ 싱가포르에선 흡연 학생 부모에 벌금

청소년의 흡연 행태가 대담해진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통제력이 약해진 데 있다. 일단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의 제재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3학년인 김모 군은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해) 누군가 시비 걸 사람도 없고 해서 별 생각 없이 길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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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부분의 어른은 청소년의 공개 흡연을 불편해하면서도 눈치만 보는 상황이다. 훈계를 하면 아이들이 대들어 시비에 휘말릴 수 있을 뿐 아니라, 홧김에 손찌검이라도 했다가는 당장 폭행 행위로 입건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 중랑구 묵동에 사는 윤모 씨(46)는 “내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을 훈계하고 싶지만 딸들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말을 아끼게 된다”고 말했다. 청소년흡연음주예방협회에 따르면 흡연을 제지하는 아파트 경비원에게 학생들이 앙갚음(경비실에 돌을 던지는 등)을 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청소년들에게 담배를 파는 것은 법에 저촉되지만, 청소년의 흡연 자체를 제재할 법 조항은 없다는 점. 물론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지만, 마약 사용처럼 형법으로 처벌하기에는 상대적으로 ‘경미’하기 때문이다. 영악한 아이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훈계하는 어른이나 경찰에게 “뭐가 문제냐”며 대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흡연 청소년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은 학교의 징계와 판매점에 대한 처벌뿐이다. 그런데 두 가지 모두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흡연 학생에 대한 징계가 학교별로 들쭉날쭉할 뿐만 아니라, 학교 복도에서의 흡연을 묵인하는 경우까지 있다. 미국과 일본 등의 선진국은 교칙 적용에 매우 엄격하다. 주별로 다르긴 하지만, 미국에선 청소년에게 담배를 판 판매인을 처벌함과 동시에 부모와 학교에 흡연 사실을 통보한다. 싱가포르에선 흡연 청소년의 부모에게 벌금을 매긴다.

판매점에 대한 처벌도 미미한 수준. 경찰청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청소년 흡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판매점을 찾아내 처벌하는 것은 아직까지 ‘개별 재량’의 문제다. 또 흡연 청소년이 아버지 담배를 들고 나왔다고 하거나, 길에서 주웠다고 우길 경우 경찰관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한 청소년 금연 운동 관계자는 “지금까지 특별단속기간 이외에 경찰이 청소년에게 담배를 파는 행위를 단속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 담배 구매 성공 확률 80%

금연 정책을 담당하는 보건복지부 건강증진과의 배금주 과장과 송명준 사무관은 청소년 흡연 문제의 해결책을 ‘접근성’과 ‘구매 능력’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청소년이 담배를 사는 데 어려움이 거의 없다. 청소년 건강 행태 온라인 조사에 따르면 현재 흡연하는 중고교 남학생 중 담배를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직접 구입한 경우가 절반이 넘었다(53.1%). 소매점에서 담배를 사려고 시도했을 때 성공한 확률은 남학생 80.9%, 여학생 81.4%나 됐다. 거의 제지를 받지 않는 셈이다. 올해 5월 서울 서초구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편의점 직원이 술이나 담배를 사려는 청소년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는 비율은 53.9%에 그쳤다. 그나마 ‘두고 왔다’고 하면 그냥 판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요즘에는 청소년들이 주민등록증의 숫자를 위조해 담배를 사는 경우도 많다. 이복근 사무총장은 “숫자를 덧붙여 위조한 주민증을 빌리는 것은 5000원, 사는 건 3만 원이면 된다”고 말했다.

담배가 다른 상품과 함께 전시돼 있는 것도 문제. 태국이나 싱가포르에서는 담배를 누구나 볼 수 있게 전시할 수 없다. 손님이 담배를 달라고 하면 점원이 셔터를 열고 꺼내야 한다.

‘지나치게 접근하기 쉬운’ 담뱃값을 손봐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현재 우리나라의 담배 1갑 가격은 2500원으로, OECD 조사대상 22개국 중 가장 싸다. 담뱃값이 가장 비싼 아일랜드는 1만4975원으로 우리나라의 6배나 된다. 영국은 1만1525원, 스웨덴은 8200원이며, 하위권인 폴란드도 3175원이다.

전문가들은 2004년 12월 이후 그대로인 담뱃값은 실질적으론 떨어진 것과 같다고 지적한다. 현재의 담뱃값은 맞벌이 부모로부터 밥값으로 5000원 용돈을 받은 학생이 ‘1500원짜리 김밥을 사먹고, 담배 한 갑 사고, PC방에 가면 딱 맞는’ 금액이다.

담뱃값 인상은 상대적으로 구매력이 떨어지는 청소년 금연에 강한 ‘약발’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에서는 담뱃값을 10% 올릴 때마다 성인 흡연율은 5%, 청소년 흡연율은 7% 떨어졌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의 담뱃값 인상안은 끝내 이달 입법예고에서 빠졌다. 흡연자들의 반발에 대한 정부 내의 이견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복근 사무총장은 “청소년 흡연의 폐해는 결국 국가적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청소년 흡연이 성인 흡연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국민건강 악화와 의료비 지출 증가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2009년 기준 대한민국의 15세 이상 남성 흡연율은 무려 44.3%로 OECD 회원국 중 그리스에 이어 2번째다.

■ 흡연이 청소년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

● 세포와 장기 손상=청소년의 세포조작과 장기는 아직 완전히 발육하지 않은 상태. 담배와 접촉하면 성숙한 세포조직과 장기보다 더 큰 손상을 입는다.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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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중독성과 다른 비행으로의 연계=청소년 흡연의 90%이상이 성인 흡연으로 이어진다. 청소년이 성인보다 니코틴에 쉽게 중독되기 때문. 흡연은 음주나 약물 중독등 다은 비행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 폐암 위험 증가=
15세 이전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사람의 폐암 사망률은 비흡연자보다 23배나 높다.

● 키가 자라지 않는다=
캐나다에서 실시된 연구 결과 흡연자(12∼17세)는 비흡연자보다 키가 평균 2.54㎝ 작았다.

도움말=맹광호 가톨릭대 의대 명예교수·대한금연학회 전 회장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채널A 영상] “어른들도 포기했나 봐요” 첫 흡연연령 ‘만 12.8세’
#흡연#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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