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네온에 꽂혔다… ‘탱고의 영혼’을 만났다

  • 동아일보

■ 젊은 연주자 고상지씨 “뜨겁고 공격적인 악기”

《 고상지 씨(29)는 국내에선 보기 드문 ‘반도네온’ 연주자다. 그에게 반도네온은 탱고이며, 탱고의 산실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는 ‘치명적인 유혹’이 아니라 앙칼지고 공격적이며 뜨거운 음악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삼남매의 막내인 그는 어린 시절 인형으로 일본 만화 ‘드래건볼’의 무술대회를 하면서 놀았다. ‘드래건퀘스트’ ‘파이널판타지’ 등 롤플레잉 게임에 나오는 전투음악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탱고를 재설계한 아스토르 피아소야의 ‘리베르탕고’를 듣고 ‘최고의 전투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KAIST에 진학한 뒤 2005년 탱고 거장 파블로 지글러의 내한공연을 보고 반도네온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수학 실력이 뛰어나 들어간 대학에선 토목공학, 산업디자인 등을 배웠지만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아 2학년 때 자퇴했다. 》
6일 서울 연희동의 카페에서 만난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 씨는 어떤 질문에든 분명하고 단호하게 답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탱고는 이것이다라고 딱 잘라서 표현하는 건 질색이다.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 카페’에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으니 한번 보기를 추천한다”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6일 서울 연희동의 카페에서 만난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 씨는 어떤 질문에든 분명하고 단호하게 답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탱고는 이것이다라고 딱 잘라서 표현하는 건 질색이다.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 카페’에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으니 한번 보기를 추천한다”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아르헨티나에 사는 이모를 통해 반도네온을 구입한 뒤 6개월가량 독학했다. 반도네온으로 처음 연주한 곡이 드래건퀘스트에 나오는 음악이었다. 우연히 연이 닿아 2006년부터 일본의 반도네온 연주자 고마쓰 료타 씨에게 배웠다. 3년간 3개월마다 2주씩 일본에 머무르면서 레슨을 받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한 통의 e메일로 시작됐다. 고마쓰 씨의 한국 팬이 고 씨 공연을 보고 ‘한국에서 혼자 애쓰는 여성 연주자가 있는데 힘내라고 해주시면 그가 기뻐할 것’이라는 메일을 고마쓰 씨에게 보낸 것. 고마쓰 씨는 한국어 발음을 알파벳으로 적은 메일을 고 씨에게 보냈다. ‘안녕하세요. 고마쓰 료타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힘내세요.’

고마쓰 씨는 반도네온 1년차 연주자에 불과한 고 씨에게 “나 좀 도와줄 수 있겠니”라며 따스하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공연에 세컨드 반도네온 연주자로 출연해 달라는 제의였다. 고 씨의 반도네온이 고장 났을 땐 자신의 무대용 악기를 선뜻 건넸다. 지금도 이 악기를 가지고 무대에 서는 고 씨는 “고마쓰 선생님은 ‘큰 존재’다. 선생님께서 주신 것을 나도 베풀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고 말했다.

2009년 고 씨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났다. 에밀리오 발카르세 오케스트라학교에서 2년간 배웠다. 고 씨는 “아르헨티나에서는 ‘슈퍼거장’ 할아버지도 1시간 레슨비가 4만 원밖에 안 된다. 탱고의 명인들이 학생을 친구(amigo)라고 부른다. 탱고 분야에선 ‘꼰대’가 없다”고 말했다.

이 학교는 1920∼50년대 탱고의 전성기 원본 악보에 충실하게 연주하도록 가르친다. 당시 작곡가들이 악보를 정식으로 출판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생존 연주자들이 보관해온 악보를 수소문하며 오리지널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국내에서 다른 영역의 연주자들과 협연하다보면 탱고 문외한들이 난도질한 편곡 악보를 흔히 사용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탱고라는 장르의 색깔이 분명한데 장르의 특성에 대한 고민 없이 자기 색깔을 입히려고 해 안타까워요. 이런 현실이 답답해서 직접 편곡을 하느라 연습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에요.”

그가 그리는 자신의 모습은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반도네온 연주자가 아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취가 깃든 탱고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 더 있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음악을 편곡해 콘서트를 꾸미는 일.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OST의 ‘타나토스’를 듣고 영감을 받아 피아소야의 ‘오블리비언’을 편곡하기도 했다.

피아소야의 서거 20주기를 맞은 올해 고 씨의 반도네온 연주 일정도 촘촘해졌다. 12일 오후 7시 반 경기 광주시문화스포츠센터 대극장에서 최문석(피아노), 윤종수(바이올린), 김동민(기타)과 연주한다. 전 석 5000원. 031-760-4466. 19일 오후 8시 서울 삼성동 올림푸스홀에선 TIMF앙상블과 호흡을 맞춘다. 전 석 3만3000원. 02-6255-3270
▼ ‘반도네온’ 건반 불규칙적 배열… 스타카토 가능, ‘아코디언’ 한 건반으로 화음 표현… 배우기 쉬워 ▼

반도네온(위), 아코디언
반도네온(위), 아코디언
반도네온은 아코디언의 사촌 격 악기. 19세기 초 독일에서 교회 오르간 대용으로 고안했다. 19세기 후반 아르헨티나에 전해진 뒤 탱고 음악의 중심 악기로 자리를 잡으면서 ‘탱고의 영혼’으로 불리게 됐다.

아스토르 피아소야는 반도네온을 ‘악마의 악기’라고 불렀다. 다루기가 어려워서다. 양옆에 붙은 단추형 건반을 눌러 소리를 내는데 건반이 음계에 맞게 순차적으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으로 배열돼 있다. 같은 건반을 눌러도 주름통을 수축할 때와 이완할 때 나는 소리가 다르다. 고상지 씨는 “규칙이 없기 때문에 암기과목 외우듯이 달달 외워야 한다”고 설명한다.

반도네온과 아코디언은 음색과 구조가 다르다. 아코디언은 주름통에서 나오는 공기의 힘으로만 연주하기에 스타카토(분할연주)가 쉽지 않은 반면에 반도네온은 건반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소리가 나 분할연주가 가능하다. 아코디언은 각 건반이 화음을 낼 수 있지만 반도네온은 각 건반이 단음만 낼 수 있어 화음을 표현하려면 여러 건반을 함께 눌러야 한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반도네온#고상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