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순간]열패감에 빠진 나날… 은사 두 분의 사랑 먹고 빛의 세계로

  • 동아일보

신은경 전 앵커의 ‘아버지 영면 후 질풍노도 시절’

신은경은 필요 없이 움츠러들고 자신이 없어질 때 ‘기품 있게’라는 말을 써놓고 본다. 그에게 이제 자존심이란 ‘내가 최고, 1등이 돼야 한다’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정말 소중한 나’를 찾는 일이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신은경은 필요 없이 움츠러들고 자신이 없어질 때 ‘기품 있게’라는 말을 써놓고 본다. 그에게 이제 자존심이란 ‘내가 최고, 1등이 돼야 한다’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정말 소중한 나’를 찾는 일이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아버지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가 집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출근길 급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거리에서 쓰러진, 4남매를 둔 가장의 마지막 가는 길. 소복을 입은 어머니가 동행했다. “아이들은 타는 거 아니야.” 만류하는 일가친척들을 막무가내로 밀쳐냈다. 타야 해. 엄마한테 가야 해. 엄마를 지켜야 해. 할 수 없다는 듯 길을 비켜준 어른들을 지나 장지로 떠나는 차에 올라탔다. 씩씩거리는 숨을 고르며 어머니 옆에 앉았다. ‘엄마,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거야.’ 곧 중학교 2학년이 되는 맏딸 신은경(54·전 KBS 9뉴스 앵커·동기부여 강사)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단단히 했다. 하지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때 이후, 그 결심이 쉬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
○ 자존심과 열등감

15세 소녀는 이 현실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부재도 부재였지만, 자신이 불행한 사람의 처지에 놓였다는 걸 용납하기 어려웠다. 자존심이 상했다. 경상도 출신의 종손인 아버지는 보수적이고 엄했다. “기댈 아빠가 그리웠다기보다는 그 상황이 너무 힘들었어요.”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어머니는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공부를 더 잘해주기를, 동생들을 잘 돌봐주기를.

하지만 신은경은 폭풍우 치는 바다의 작은 돛단배 같았다.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남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그 모든 것이 힘들었다. 중학교 때까지 성적은 좋았지만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속내를 숨기며 명랑하게 웃고 떠들었지만, 집에 오면 상처받은 마음을 일기장에 한도 끝도 없이 써댔다. 수업시간에 어떤 아이에게 느낀 미묘한 감정에서부터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원망까지. 엄마한테 잘하고 싶다가도 모든 게 다 힘들고 마음에 안 든다는 내용도 담았다. 그의 일기장을 본 학교 상담선생님이 말미에 글을 남겼다. ‘너의 고민들을 이해할 만하다… 그런 것만큼 엄마 생각을 하여라.’

“행복하고 날씨 좋다, 이런 느낌보다는 항상 구름이 끼어 있고 어떤 때는 비도 오고. 하지만 그런 말은 안 하고 살았어요. 싫다는 표현도 속으로 삭이고….”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 엄마를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바람은 진명여고에 들어가 치른 첫 시험에서 무너졌다. 수학 10문제 중 겨우 4문제를 풀어서 받은 40점. 의기소침해졌다. 과외나 학원은 생각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열등감은 커져만 갔다. 공부를 잘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안갯속에 있는 것 같았다. 어려워서 못 하고, 몰라서 못 하고, 해도 안 됐다. 결국 공부는 뒷전이 됐고 관심은 옆길로 흘렀다. 수업을 합법적으로 빼먹을 수 있는 과외 활동에 매달렸다. 문예반 반장, 학생 기수(旗手), 보수연(保壽宴)이라는 학내 교사·학생 생일잔치의 대표, 학교방송 아나운서, 클래식 기타주자…. ‘공부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재미가 들린 일들은 쉽게 놓지 못했다.

되고 싶었던 의사의 꿈은 일찌감치 접었다. 입시 성적도 좋을 수 없었다. 학교에 대입 원서를 쓰러 오겠다는 엄마를 극구 말렸다. 엄마가 원하는 과를 말하면 선생님이 “어휴, 이 실력으로는 거기 안 돼요”라고 말할 게 뻔했다. 엄마가 겪을 그 수치를 자신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엄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삶의 한 부분이 무너지니까 그걸 메우기 위해 공부도 더 잘해야 하고, 내 존재도 더 확실하게 해야 하는데 점점 더 힘이 들고. 내 딴에는 실패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계속됐어요.” 그런데 그 격랑 속에서도 한줄기 빛들은 비치고 있었다.

○ 사랑의 빚

“여러분, 어때요. 참 듣기 좋죠.” 고등학교 2학년 국어시간. 갑작스레 칠판 앞으로 불려 나와 교과서 한 대목을 낭독한 신은경은 선생님의 느닷없는 칭찬에 깜짝 놀랐다. 어디 쓸모도 없고, 어디 정말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열패감에 시달리던 그였다. 자기 자신을 자신이 제일 미워하던 때였다. 그런 차에 무섭기로 소문난 이정숙 선생님이 상처 입고 잔뜩 웅크린 그를 건져낸 것이다. 방송반이 따로 없던 학교에서 이 선생님은 그를 교내 행사의 사회자로, 체육대회 장내 아나운서로 조련해줬다. 마이크에 재미를 처음 붙인 순간이었다.

네모난 하얀색 배지가 너무나 예뻐 보였던 성신여대. 재수를 하라는 엄마에게 영어교육과에 가서 좋아하는 영어를 정말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하고 입학한 학교였다. 그러나 들어가고 나니 또 열등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저 신촌 어디에 있는 학교는 봄이면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데 여기는 왜 이리 바람은 불고 언덕은 이다지도 올라가기 힘들까.’ 다시 공부는 뒷전이었다. 학교 방송반과 영자(英字)신문반 활동에 빠졌다.

그때 영자신문반 조승국 교수가 계셨다. 영어교육에 열정을 쏟으셨던 조 교수님은 영자신문반 학생 4명을 성심성의껏 돌봐주셨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에도 이들만을 위해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말만 한 처녀들은 몇십 분 늦게 오는 일이 다반사였고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조 교수님은 너무도 열심히 영어를 가르쳐 주셨다.

“맨날 빚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빚이라는 건 좋은 것 같아요. 사랑의 빚. 선생님께 갚을 길은 없지만 뭐라도 잘해서 자랑하고 싶었고,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거 있잖아요.” 선생님들께 진 빚, 다시 말하면 선생님들의 은혜에 뭔가를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을 추동하는 힘이기도 했다.

비록 MBC 시험에서는 보기 좋게 1차 카메라 테스트에서 떨어지고, 당시 TBC 시험은 방송통폐합으로 기회가 무산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1981년 5월 KBS 아나운서 시험에 붙었다. 그러고 나니 이정숙 선생님께 약간의 빚을 갚은 느낌이었다. KBS 9시 뉴스 앵커를 11년여 하면서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면서는 조 교수님께 조금의 빚을 갚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들이 이어지면서 삶이 계속되는 것 같아요. 인생에서 내게 힘을 주셨던 분에게 그걸 당시에는 갚지 못해도 어느 순간 갚을 때가 오고, 내가 또 어떤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잖아요.”

○ 아버지, 아버지

죽 세상의 중심은 신은경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상처받은 마음과 나름의 고난에 힘겨워할 때도, 아나운서로 가장 좋은 자리에서 가장 좋은 시간을 보냈을 때도, 중심은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고, 자기 존재감이 필요했다. 자신이 하는 어떤 부분만큼은 남이 간섭하는 것도, 남이 나를 나쁘게 하는 것도 용납하지 못했다. 자주 자존심이 상했고, 그만큼 열등감이 엄습했다.

물론 그런 열등감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가 있을까도 싶다. 자주 하는 상상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그래서 자존심에 금이 가지 않고 열등감에 휩싸일 일이 많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저 일찍 결혼해서 얌전하고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 같다. 치열하게 살지 않았을 듯하다.

하지만 이제 그의 마음에는 소용돌이가 치지 않는다. 이젠 자신이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의 아버지는 부재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뒤 그에게는 새로운 중심이 생겼다. 갑자기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편안하고 자유로워졌다. 그는 이를 ‘자유하다’라고 표현했다. “이전까지 표류하는 조각배였다면 지금은 닻을 내린 배 같아요. 안전함. 그런 느낌.” 신은경은 그를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그런 느낌을 전하고 있다. 자존심 때문에 마음 아파하던 그는 이제 사람들의 마음에 자존감을 심어주고 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신은경#내 인생을 바꾼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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