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전도’(정선, 1734년), 국보 217호, 종이에 옅은 채색, 94.1×130.6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우리가 한 송이의 꽃으로 피어난 듯하다(왼쪽). ‘금강산도’(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56.0×126.2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각기 독립된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저마다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벌써 4년째다. 2008년 7월, 남한 여행객이 북한군에 피살당한 사건이 계기였다. 이후 남북관계도 급속하게 냉각됐다. 우리에게 금강산은 남북 관계의 ‘바로미터’다. 사람들은 금강산 관광을 하면 남북관계가 좋은 것이고, 중단되면 나빠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종합적인 남북 관계란 금강산만이 아닌, 좀 더 거시적인 틀에서 봐야 하는데도 말이다.
원래 금강산은 ‘풍악산’ 또는 ‘개골산’이라 하여 기이하고 아름다운 경치로 이름이 드높았다. 금강산이란 이름은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는 화엄경 내용에서 유래했다. 불교가 성행한 고려시대의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이 불교적 명칭을 못마땅해 한 데다 신선사상이 유행하면서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삼신산 중 하나인 ‘봉래산’이란 이름이 부각되기도 했다. 기묘한 절경과 불교의 성지, 신선세계에 남북 관계의 상징까지. 금강산의 명칭과 이미지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그렇게 변해왔다.
○ 금강산을 향한 꿈
화가 최북(崔北·1712∼1786?)은 금강산 내금강의 구룡연(九龍淵)에 이르러 “천하명인(天下名人) 최북은 천하명산(天下名山)에서 죽어야 한다”고 외치며 뛰어내렸다 간신히 살아났다. 비슷한 사건이 조선 전기에도 벌어진 적이 있었다. 명나라 사신이 금강산의 절경에 취해 계곡에 빠져죽은 것. 당시 금강산의 명성은 나라 밖까지 전해져 중국이나 일본의 사신들이 금강산 구경을 간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녀 출신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제주 거상 김만덕(金萬德·1739∼1812)은 기근에 처한 제주 백성을 사재로 구제했다. 정조가 김만덕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그를 궁으로 불러 소원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김만덕은 “천하명산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게 소원”이라고 답했다. 금강산에 대한 간절함은 예나 지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 만큼 강렬했다. 그런 염원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일까. 금강산을 소재로 한 그림들에는 왠지 모를 특별함이 넘친다.
○ 겸제 정선의 금강전도
천하의 명기라도 명인을 만나지 못하면 그 신비한 울림을 낼 수 없는 법이다. 1712년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인 정선(鄭·1676∼1759)은 당대 최고 시인 이병연(李秉淵·1671∼1751)과 함께 금강산을 찾았다. 김창업은 이를 두고 “정선의 그림과 이병연의 시, 금강산이 있고 나서 이런 기이함은 없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정선은 금강산 탐방 이후 22년이 지난 1734년에 ‘금강전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라는 명작을 탄생시켰다. 이 작품은 오랜 세월 동안 가슴속에서 숙성시킨 ‘마음의 풍경(心象)’이다. 정선이 그림 위에 쓴 제발(題跋)을 보면, 그는 개골산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또 산을 직접 돌아다니기 힘드니 그림을 머리맡에 두고 보라고 했다. 누워서 즐긴다는 뜻의 ‘와유(臥遊)사상’이다. 정선은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우리를 하나의 원형으로 응집시켜 표현했다. 봉우리 하나하나를 부각하기보다는 전체의 조화를 꾀했다.
쌀 모양의 미점(米點)으로 처리한 흙산과 서릿발 같은 선으로 표현한 바위산의 조합은 마치 활짝 핀 한 송이의 꽃과 같다. 이는 태극의 음양과 같은 구조로 해석되기도 한다. 양에 해당하는 바위산과 음이 되는 흙산이 화합을 이룬 형상이란 것이다. 그 모양이 영락없는 태극의 형태이다. 정선이 역학에 능했다는 기록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이념의 꽃봉오리로 피어난 금강전도는 여러 후대 금강산 그림의 모델로 각광을 받았다.
○ 귀로 들은 금강산 그림
한편 서민들 사이에는 “금강산 유람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는 속설이 퍼지면서 너나 할 것 없이 금강산을 찾는 게 유행했다. 무명의 화가들은 금강산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금강산의 꿈과 이야기를 그림으로 전했다.
정선의 금강산 그림이 후대 작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민화작가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금강산도를 창출했다. 그중에서도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민화 ‘금강산도’는 정선의 금강전도와 정반대의 시각으로 접근한 그림이다. 정선이 일만 이천 봉을 응집시켜 표현했다면, 민화작가는 각 봉우리들을 해체해 하나하나 아로새겼다. 정선의 금강전도처럼 전체의 형태를 통일시킨 것이 아니라 ‘따로 또 같이’의 나열식 구성을 취한 것이다. 여기서 각각의 봉우리들은 그곳에 전해오는 설화에 맞춰 실감나게 표현됐다. 사자암엔 사자모양의 바위가 드러누워 있고, 구룡연에는 계곡의 주위를 거대한 용이 감싸고 있다. 설화를 좋아하는 서민들의 취향에 맞게 봉우리에 얽힌 이야기를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정선은 실제 눈으로 본 금강산을 새로운 인식의 틀 속에서 재구성했다. 그러나 민화작가는 눈으로 본 금강산이 아니라 ‘귀로 들은 금강산’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정선이 일만이천 봉우리를 하나의 이념으로 응집시켰다면, 민화작가는 봉우리별 특색을 잘 살려 펼쳐냈다. 정선과 정반대로 접근한 민화작가의 과감한 역발상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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