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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무게 285t 팔만대장경, 왜 강화서 해인사로 옮겼을까

입력 2011-08-11 03:00업데이트 2011-08-1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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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훼손 방지용” “조선 개국 과시용”
경남 합천군 해인사 대적광전 외벽에 그려진 ‘대장경 이운(移運)’ 벽화. 팔만대장경을 옮기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기존 그림을 바탕으로 1990년대 중반에 새로 그린 것이다. 해인사 제공
■ 강화역사박물관 학술회의서 논쟁

경남 합천군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 1237년부터 16년간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호국 의지를 담아 제작한 세계적인 기록유산이다. 제작 이후 인천 강화도에 보관돼 있던 것을 조선 태조 때 해인사로 옮겼다고 ‘태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목판 1장의 평균 무게는 3.5kg으로 총 8만1350장에 이르는 팔만대장경의 전체 무게는 약 285t에 달한다. 조선시대라면 소달구지 400대 이상이 동원돼야 하고 지금도 옮기려면 8t 트럭 36대가 필요하다.

이런 대규모의 대장경을 강화도 선원사에서 합천 해인사로 언제 어떻게 옮긴 것일까. 또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아쉽게도 구체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이에 대한 추론과 상상은 있어 왔지만 본격적인 학술 논의는 별로 이뤄지지 않았다.

팔만대장경의 모체 격인 초조대장경 판각 시작 1000년을 기념해 이 문제를 점검해 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10일 인천 강화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고려대장경 강화도 학술회의’. 한상길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고려대장경의 해인사 이운(移運) 시기와 경로’를 주제로 팔만대장경을 옮긴 이유와 방법, 시기에 대한 기존 연구를 되짚으며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대장경을 보호하기 위해 “물길과 육지길을 모두 이용해 옮겼다”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이에 대해 심효섭 가천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반박하는 등 논의는 흥미롭게 진행됐다.

팔만대장경이 옮겨진 시기에 대해서는 한 교수와 심 연구실장 모두 1397년에 옮기는 준비작업을 시작해 1398년 5월 10일 강화도를 출발해 1399년 1월 이전에 해인사로 옮겼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태조실록의 짤막한 기록과 만해 한용운 등의 연구를 수용한 것이다.

옮긴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한 교수는 고려 말∼조선 초 강화도 일대에 있었던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을 예로 들면서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대장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실제로 왜구는 공민왕 때인 1360년 선원사를 포함한 두 곳의 절을 침탈해 약 300명을 죽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심 연구실장은 “강화도가 왜구 침입으로 위험한 지역이었다면 주요 기록을 보존해야 하는 정족산사고(史庫)를 조선이 강화도에 지었을 리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 대신 “새로 나라를 세운 태조가 고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을 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벌인 대규모 국가 행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태조가 불교신자라는 점과 태조실록에 나와 있듯이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가는 길에 서울 지천사(支天寺·서울 플라자호텔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절)로 대장경을 잠시 옮긴 것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옮긴 경로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다. 한 교수는 “조선시대엔 엄청난 분량의 물건을 옮길 때 가능한 곳까지 수로를 이용했다는 점, 해인사에 남아 있는 대장경 이운 벽화가 해인사 인근 개포(개경포)나루에서 해인사로 옮기는 장면일 수 있다는 점으로 보아 서울∼충주 구간은 물길을 이용하고 충주∼조령∼문경∼구미∼해인사는 육로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심 실장은 “태조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행사로 기획했다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물길은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특히 물에 약한 목판을 물길로 옮긴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어서 가능성이 낮다”고 반박했다. 그 대신 태조실록 등에 짧게 언급돼 있듯이 군사 2000명을 동원하고 승도들로 하여금 불경을 외우게 하고 의장대는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대장경을 옮기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육로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해인사의 성안 스님은 토론에서 “남해 일대에서 제작돼 해인사로 옮겨졌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고려대장경 조성과 강화도 △대장도감의 조직과 역할 △고려대장경의 목록과 교정 작업 △강화도 대장경판당과 선원사 등에 대한 발표와 토론도 진행됐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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