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 축전 D-6개월]세계가 인정한 팔만대장경, 고려의 호국혼 담긴 불교문화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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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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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모든 것

‘고려시대 몽골 침략군을 불력(佛力)을 빌려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만들었다’ ‘국보인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축물이 습도를 잘 조절해 나무 경판이 썩지 않았다.’ 누구라도 이 정도는 알고 있을 만큼 대장경에 대한 관심은 많은 편이다.

○ 대장경(大藏經)이란?

부처가 45년간 중생에게 설법한 내용, 불교 교리를 빠짐없이 기록한 불교 경전 전집으로 볼 수 있다. 불교의 경(經) 율(律) 논(論) 등 삼장(三藏)을 모았다. ‘세 개의 광주리’란 뜻인 산스크리트어 Tri-pitaka를 번역한 것. ‘삼장경’ ‘일체경’이라고도 부른다. 크리스트교의 성서, 이슬람교의 코란처럼 불교의 성전이라고 보면 된다.

대장경은 고려시대 국가사업으로 진행됐다. 먼저 간행한 초조대장경은 1011년 부처의 힘으로 거란 침공을 물리치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1087년까지 77년간 작업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대장각판 군신기고문(大藏刻版 君臣祈告文)’은 “현종 2년(1011년) 거란 임금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침략해 왔습니다.

현종께서는 남쪽으로 피란을 가시고, 거란의 병사들은 송악성에 주둔해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임금과 신하들이 큰 소원을 세워 대장경 판본을 새겨 완성시키겠다는 맹세를 했습니다. 그 후에 거란의 병사들이 스스로 물러갔습니다”라고 간행 정황을 설명했다.

대장경 천년문화축전에서 천년이란 이 초조대장경을 간행한 시기를 뜻한다.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골군 방화로 불탔다. 국내에 인경본(인쇄된 책) 250여 권, 일본 남선사, 쓰시마 등지에 인경본 2500여 권이 남아 있다. 1236년 대장경 간행을 다시 추진해 1251년에 완성한 것이 합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국보 32호. 정식 명칭은 고려대장경. 경판 수가 8만1350판이나 돼 흔히 팔만대장경으로 부른다. 7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완벽한 목판으로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목판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삼장을 집대성했고 내용이 정확해 세계 각국에 전파됐다.

고려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은 그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1995년 유네스코에서 경판을 봉안한 장경판전(국보 52호)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2007년에는 팔만대장경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렸다. 역사, 문화적 가치가 크다는 의미다. 조선시대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은 팔만대장경판 글씨에 대해 “사람이 쓴 게 아니라 마치 신선이 내려와서 쓴 것 같다”고 평가했다.

목판 전체 무게는 280t. 8만1350장을 모두 쌓으면 3200m로 백두산(2774m)보다 높다. 목판을 한 줄로 이으면 약 60km나 된다. 경전에 새겨진 5200여만 자 가운데 오탈자는 158자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8만여 판을 책으로 찍어내면 6791권이 된다. 작업에는 연인원 130만여 명이 필요하다.

○ 장경판전의 비밀

잘 썩고 벌레 먹기 쉬운 나무로 만든 경판을 7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비결은 장경판전 건축법에 있다는 분석. 건물 4동, 전체 기둥 수는 108개다. 이는 108번뇌를 뜻한다고 전해진다.

장경판전은 경판 보관 기능을 살리기 위해 건물 내부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목판은 자연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서로 다른 크기인 붙박이 살창에 있다. 벽면 아래 위와 건물 앞면, 뒷면 살창 크기를 다르게 했다.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서 아래와 위로 돌아 나가도록 했다. 건조한 공기가 건물 내부에 골고루 퍼진 뒤 빠져나가도록 한 것이다.

판가(板架)는 굵은 각재를 설치한 뒤 경판을 두 단씩 세워 놓아 햇빛과 공기의 유통이 잘 되도록 했다. 각 단에 배열된 경판과 경판 틈새가 일종의 굴뚝 효과를 내 경판 표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한다. 바닥은 땅을 깊이 판 뒤 숯 찰흙 모래 소금 횟가루를 뿌렸다. 습도를 자동적으로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판이 새로 새긴 듯하고 날아다니는 새들도 이 집을 피해 기와지붕에 앉지 않으니 실로 이상한 일”이라고 기록했다. 장경판전을 30년째 지키고 있는 장경각 장주(지킴이) 관후 스님은 “관람객들이 장경판전 안에 이상한 책이나 음료수 캔을 넣거나 판전 외부에 낙서를 하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며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을 인류 유산으로 여기고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팔만대장경, 그 세 번의 위기


초조대장경은 몽골군 침입으로 이미 사라졌다.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숱한 위기를 넘겼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해인사로 왔다면 대장경 역시 불타 없어졌을지 모른다. 해인사 스님들과 합천군민도 대장경을 지켜내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강점기에는 대장경을 일본으로 통째로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대장경을 옮기는데 4t트럭 70여 대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고 중도에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6·25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이 해인사 등 산속 사찰에 숨어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김영환 장군(1921∼1954·당시 대령)은 그해 8월 “무장공비가 많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해인사를 폭격하면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인 대장경이 소실된다”며 동료 조종사들의 폭격을 중지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인사는 매년 김 장군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윤희각 기자 to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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