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해도해도 끝없는 음식-차례 준비… “명절 앞두고 도망치고 싶었지요”

동아일보 입력 2010-09-17 03:00수정 2010-09-17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이리 와 봐라. 고름을 이쁘게 매야지.” 수애당의 젊은 안주인 문정현 씨(오른쪽)의 한복 고름을 시어머니 이동여 씨가 매만져주고 있다. 고부는 손발을 척척 맞춰가며 추석 준비를 했다.
수애당 안주인 문정현 씨는 이제 안동에서 이름 대신 ‘수애당’이라 불린답니다. 할매들이 한마디씩 거드네요.

“안동서 수애당 모리는 사람 있나.”

“웃대 조상이 집터를 잘 잡았제. ‘조상 덕에 이밥’이라는 말 안 있나.”

문 씨는 처녀 적 삼성시계 사원으로 서울 광화문 삼성그룹 본관에서 일했습니다. 국내외 영업을 담당했지요. 워낙 적극적인 성격에다 ‘또순이’ 기질이 있어 여직원 모임 총무를 맡았고 꽃꽂이, 등공예, 지점토 등 뭐든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아는 언니’ 소개로 안동 종갓집 아들인 류효진 씨(47)를 만나 결혼했지요.

주요기사
명절에 수애당을 찾는 45명 정도 되는 일가친척들의 밥상, 5대 봉사(奉祀)를 위한 차례상 준비를 문 씨가 책임집니다. 선산이 집 근처에 있어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친척들이 명절이면 이곳으로 모여듭니다. 많을 때는 100여 명까지 모였다네요.

문 씨는 3년 전부터 손님들에게 음식 내는 일을 시어머니로부터 넘겨받았습니다. 집의 한쪽 끝인 부엌부터 반대쪽 끝인 사랑방까지 문을 활짝 열고 상 8개를 줄 맞춰 펴는 걸로 본격적인 명절 준비가 시작됩니다.

○ 종부(宗婦)로 살아가기

1. 채소 자투리로 부친 간식용 전
2. 쇠고기, 토란대, 당근, 배추를 꿰어 만든 산적
3. 간장과 설탕으로만 은근한 맛을 낸 닭조림
4. 가오리, 상어, 고등어찜
5. 복분자로 곱게 물들인 증편
안동은 집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고 묘사(墓祀·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만 지냅니다. 15위(位)를 모시는데 위마다 제사음식을 따로따로 싸야 한다는군요. 한 위에 썼던 걸 다른 위에 다시 써서는 안 된답니다. 문 씨는 10여 년 전을 떠올립니다.

“처음 안동에 내려와 살기 시작한 뒤로 명절을 앞두면 도망가고 싶었어요. 한옥이 구석구석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한 달 전부터 방마다 청소하고 한지 구멍 난 거 메우고…. 수십 인분 음식에 제수 준비에…. 아유, 얼마나 일이 많고 스트레스가 쌓이는지요. 6년쯤 지났을 땐가, ‘내 일이다’ 생각하니까 마음이 스르르 편해지더라고요.”

“그래, 맞다. 내도 설이나 추석 좀 누가 훔쳐 갔시모 했다.”

할매들은 산적을 먼저 만들기로 했습니다. 문 씨의 시어머니 이동여 씨가 ‘현장 지휘’에 나섰지요. 먼저 나무 도마에 쇠고기를 잘 펴서 올린 뒤 칼등으로 고루 쳐서 육질을 부드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정영교 할머니가 나무꼬치에 쇠고기를 나란히 끼우고요.

“고기 키가 나란해야지 그래 제각각이면 되겠나. 키 좀 맞춰봐라.”

“다 끼운 다음에 한 번에 칼로 짜르면 된다.”

“채소는 색깔이 나게 골고루 섞어가 끼워라.”

“뭐 이래도 괜찮은데 그라노.”

“짜우면 몬 고친다. 간은 싱겁게 해라.”

전날 손질해둔 쪽파와 토란대, 당근을 고기 사이 사이에 끼워놓으니 푸짐해 보이네요. 수십 년간 온갖 상차림을 도맡아 해온 할매들이지만, 이제는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쭈그리고 앉아 일을 하려니 허리가 쿡쿡 쑤시고 손가락에도 힘이 없답니다. 예전에는 무의식적으로 척척 해내던 요리도 이제는 중간 과정 하나씩을 쏙 빼먹고 하기 일쑤고요. 산적꼬치에 단단한 당근을 한 번에 쑥 끼우기도 쉽지 않네요.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산적을 굽다가 좀 태웠습니다.

“아이고, 우짜다 이래 태웠노. 베맀네, 베맀어.”

“옛날에는 명절 준비할 때 어땠는지 아나. 일을 제대로 못 하면 ‘이 성씨는 어데서 일로 출가를 했노’ ‘옳은 가문에서 시집와서 음식을 이래 해놓나’ 이랬다꼬. 친정 거 잘하면 뭐 하노. 류 씨 집안 거 새로 배워야지.”

○ 산 자와 죽은 자가 어우러진다

문 씨가 부엌에서 생선찜을 들고 오네요. 산으로 둘러싸인 안동에서 차례상에 생선이 빠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귀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상어와 가오리, 고등어를 쪘습니다.

“차례상에 올리는 생선은 ‘어’만 쓰고 ‘치’는 안 쓰는 거 아나. 상어, 고등어, 문어, 방어 이런 것만 쓴다 그 말이지. 꽁치, 갈치 같은 건 안 올린다.”

“수애당은 고등어도 쓰나.”

“예전에는 낮은 기라고 안 썼는데 요새는 쓴다. 큰 기 맛있다.”

서울 유명 호텔의 외국인 셰프가 칭찬을 아끼지 않은 닭조림이 그 뒤를 따릅니다. 간장, 설탕, 물을 섞어 닭에 잘 끼얹은 뒤 약 40분 동안 은근한 불에 올려 양념이 잘 스며들도록 하면 됩니다.

옛날처럼 손님이 많지 않고 또 요즘 젊은 사람들이 제사음식을 잘 싸가려고 하지 않아서 종류와 양을 많이 줄인 거랍니다. 문 씨는 “어머니께서 ‘야야, 그거 요새 누가 먹는다고 하노. 고마 하지 마라’라고 하실 때가 많다”면서 웃었습니다. 문 씨를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입가에 쓸쓸함이 살짝 스쳐 지나갑니다. 다른 할머니들도 고개를 끄덕끄덕하네요.

“그래, 음식 많이 해봐야 다 소비를 몬 시킨다. 남아서 버리느니 줄이야지.… 그래도 제사음식 맛있는데….”

추석날 묘사를 지내고 오면 제사 음식을 다 풀어놓고 된장찌개를 끓여서 생나물 비빔밥을 해 먹습니다. 안동 할매들이 추석을 기다리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뭘까요. 도시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텃밭에 씨앗을 뿌리는 거랍니다. 자식들이 큼지막한 그릇에 그 연한 채소를 손으로 북북 뜯어 밥을 싹싹 비벼 맛있게 한 그릇을 먹어치우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문 씨는 처음에 깜짝 놀랐답니다. 추석 전날 고향에 돌아온 자식들이 집에 들어서면서 “엄마, 된장에 생나물 비빔밥!” 한다고요.

“손으로 뜯어서 쓱쓱 비벼 먹는 걸 보니, ‘양반들이 격식도 없이 이게 뭐람’ 그랬는데, 그 한 그릇에 엄마의 정성과 마음이 담겨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죠.”

그에게 명절이란 그런 것이더래요. 지금 우리를 있게 해준 조상을 생각하고 그분들이 물려준 전통을 생각하는 날, 가족들끼리 한데 모여 서로 마음을 나누는 날….

수애당 흙 마당에 서 있으면 바람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뎅그랑 맑은 풍경소리가 더해집니다. 진중한 고택들은 옛이야기를 나직이 속삭일까요.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자니, 이곳 안동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한없이 평온해지네요. 고즈넉한 고택이 활기로 넘쳐나는 때가 명절이지요. 고소한 기름 냄새가 담을 훌쩍 넘고, 웃음꽃이 화르르 피어나겠지요, 달 밝은 추석에.

글 안동=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사진 안동=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