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연극 ‘다윈의 거북이’

  • 동아일보

휴머니즘에 보낸 통렬한 야유 주제의식 갇혀 후반은 늘어져

다윈의 진화론과 유럽 현대사를 접목한 풍자를 통해 도덕적 관점에서 과연 인간이 진화하고 있는가를 되묻는 연극 ‘다윈의 거북이’. 사진 제공 서울시극단
다윈의 진화론과 유럽 현대사를 접목한 풍자를 통해 도덕적 관점에서 과연 인간이 진화하고 있는가를 되묻는 연극 ‘다윈의 거북이’. 사진 제공 서울시극단
극 초반 웃음이 폭발한다. 유명 역사교수의 집으로 찾아온 정체불명의 꼬부랑 노파. 자신이 1835년 찰스 다윈이 남태평양 갈라파고스 섬에서 데려온 거북이 해리엇이라고 주장하자 교수는 코웃음을 친다. 교수는 사실과 논리의 힘으로 이 노파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려 하지만 노파가 툭툭 던지는 말에 휘청거리다 끝내 무릎을 꿇고 만다.

200살이 넘은 해리엇은 교수가 책으로만 읽었던 역사적 사건의 목격자다. 교수가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적 사실은…”이라고 말하면 해리엇은 “제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으로 응수한다. 심지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박물학자였던 다윈이 암거북인 자신을 수컷으로 잘못 알아서 100년 가까이 자신이 해리로 불렸다는 사실까지 거론한다. 논리적으로 거북이가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느냐는 공격에 해리엇은 다윈의 ‘종의 기원’ 13장을 인용해 반박한다. “극한 상황에서 생물체는 급속한 형태로 진화할 수 있다.”

서울시극단의 연극 ‘다윈의 거북이’(연출 김동현)는 이런 지적유희를 통해 다윈의 진화론과 유럽 현대사를 포개 놓는다. 시속 2m로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거북이의 가장 낮은 시선으로 인간이 과연 진화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인지를 따져 묻는다. 해리엇은 교양으로서 박제된 유럽 현대사를 찢어버리고 피가 뚝뚝 흐르는 생물로서 유럽 현대사를 제시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한 공산주의가 유럽 대륙을 공포와 피로 물들인 괴물로 변해갔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던 히틀러의 꿈같은 연설이 유대인 학살이란 악몽을 현실화했다는 점을 그 희생자의 목소리로 고발한다.

해리엇은 유럽인들이 쉽게 망각 속에 묻어버린 만행의 역사를 자신의 등껍데기에 고스란히 짊어진 존재다. “내 기억은 내 등껍데기처럼 너무 딱딱해요. 그리고 너무 무거워요”라는 해리엇의 고통에 찬 절규가 이를 상징한다. 그의 고통에 찬 증언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여전히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교수는 그를 학문 발표의 도구로만 바라보고, 그 아내 베티(강지은)는 해리엇을 구경거리로 만들어 돈 벌 궁리를 하고, 그의 비밀을 알게 된 의사(김신기) 역시 신기한 실험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스페인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44)는 이런 이기적 인간군상과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해리엇의 대비를 통해 휴머니즘의 본고장을 자처하는 유럽에 통렬한 야유를 보낸다.

하지만 극 초반의 기발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풍자정신은 이런 반(反)휴머니즘의 주제의식에 발목을 붙잡혀 후반부는 구태의연하게 흘러간다. 그보다는 강애심 씨의 능청맞은 해리엇과 강신구 씨의 냉소적 교수가 펼치는 역사 패러디를 좀 더 펼쳐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1월 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02-399-1114∼6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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