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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8월 15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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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표가 너무 많네, 나의 사랑하는 모차르트여.” “필요한 만큼만 많을 뿐입니다, 전하.”
1782년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유괴’가 초연된 뒤 당시 오스트리아의 국왕이던 요제프 2세와 모차르트 사이에 오간 서신의 내용이다.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 등 귀족사회를 풍자하는 오페라를 창작했으나 왕을 비롯한 권력계층의 후원을 박차고 나오지 못했다. 그는 예술가로서 자유를 원했지만 끊임없이 간섭을 받고 작품을 수정해야 했다.
“영주여! 당신 따위가 무엇이냐, 그저 우연히 태어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는 나 스스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20여 년 뒤인 1805년 베토벤은 절친하게 지내던 영주 리히노프스키가 친지들 앞에서 연주할 것을 강요하자 격렬히 화를 내며 이같이 말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베토벤은 모차르트와는 달리 권력에서 독립해 대담하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내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베토벤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요제프 2세를 위한 장례음악’ ‘레오폴트 2세를 위한 대관식 칸타타’ 등을 작곡하며 권력과 타협하곤 했다.
중세부터 근대까지 음악가의 신분은 줄곧 ‘궁정의 신하’에 머물렀다. 권력자의 후원 없이는 명성을 얻기는커녕 생계를 유지하거나 작품을 공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독일 출신 작곡가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는 1781년 ‘음악예술지’를 창간해 전제주의를 비판했지만 결국 왕과 귀족의 반감을 사 베를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음악가들이 권력에 적극 봉사했던 시기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사상에 따르면 음악은 본질적으로 대중적 효과가 있으며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격앙시키며 최면을 걸 수 있다. 그로 인해서 불법과 합법, 선과 악, ‘우리가 가진 정당성’을 추구하는 너와 나의 경계가 불명확해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치 치하에서 음악은 국가권력의 유지와 확대를 위한 도구였다. 바그너 가문은 독일 바이로이트에 있는 반프리트 저택에서 해마다 음악축제를 열어 히틀러의 ‘음악 정치’에 무대를 제공했다.
히틀러는 독일 내 소극장을 폐쇄해 모든 극장 관계자들을 바이로이트로 모이도록 하는 조치로 이에 화답했다. 당대 작곡가들은 익히기 쉽고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를 지었으며 이에 ‘독일’ ‘조국’ ‘민족’ ‘돌격하다’ ‘자랑스러운’ 등의 단어를 사용한 가사를 붙였다. 유대인 음악가들은 강제수용소로 붙잡혀 가거나 망명해야 했다.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음악가가 탄압을 받는 일은 최근까지도 일어나고 있다. 1930년대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 등의 작품으로 스탈린의 반감을 산 쇼스타코비치는 ‘민중의 적’이 되어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 뒤 정부의 구미에 맞는 작품과 자신의 예술적 영감에 따른 작품, 즉 정부의 요구와 거리를 둔 작품을 번갈아 작곡하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던 그는 스탈린이 사망한 뒤에야 상당 부분 예술가로서의 자유를 얻었다.
저자는 “이런 사례들은 음악이 얼마나 정치적인지, 그리고 악용될 소지가 얼마나 많은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고 말한 뒤 “‘음악과 권력’이라는 주제로 훑어본 수백 년의 풍경은 많이 바뀌지 않았다. 음악에 재정을 지원하는 주체가 귀족에서 재벌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음악의 긍정적, 부정적 가능성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의 말을 인용하며 책을 끝맺는다.
“공동체에서 음악만큼 쓸모 있는 도구는 없다.…만약 모든 사람이 음악을 배운다면, 우리 모두는 과연 가장 아름답게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사는 올바른 길로 다가갈 수 있을까? 과연 사람은 이러한 방식으로 세계 평화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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