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여인의 향기 vs 집시의 애환… 탱고와 플라멩코

  • 입력 2008년 11월 28일 02시 59분


걸을수 있다면 누구나 탱고

속마음 감출수 없다면 플라멩코

최근 국내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 카페’는 1940, 50년대를 풍미한 23명의 탱고 거장(巨匠)이 콜론 극장에 모여 과거의 영화(榮華)를 재현한 공연을 다룬다.

영화에 나오는 탱고 음악의 가사는 애절한 사랑의 감정을 담고 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당신은 나를 떠나 망각 속에 묻어달라 하네.’

마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던 국내 가수 심수봉의 노래와 그 정서가 닮았다. 하긴 1880년대 아르헨티나 부둣가 ‘보카’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시작돼 스페인, 이탈리아 등으로부터 온 이민자들의 고달픔을 달래던 춤과 음악이 탱고 아니던가.

한편 플라멩코는 15세기 중엽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흘러들어온 집시들의 문화와 이 지역을 점령했던 아랍계인 모르족의 문화가 한데 섞여 즉흥적 예술로 발달했다.

요즘 배우 김희애가 플라멩코 춤을 추는 모 화장품 광고를 보면서 그 매혹적 자태를 부러워하는 여성이 많지만, 실상 플라멩코는 삶의 애환을 절규하듯 춤에 싣는다. 그래서 플라멩코 음악은 ‘깊은 내면의 노래’란 뜻의 ‘칸테 혼도(Cante Jondo)’로 불린다.

불황으로 삶이 무겁고 각박하게 느껴지는 이때. 매우 이국적이지만 한(恨)의 정서를 지닌 탱고와 플라멩코는 어쩌면 우리네 마음 속의 우울함을 위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갑이 얇아져 탱고와 플라멩코의 발생지인 아르헨티나나 스페인 여행을 꿈꾸긴 어렵다 해도 생명력이 깃든 음악과 춤을 통해 삶의 열정을 지필 수 있을지 모른다.

○ 강렬하고도 애절한 인생의 단면

21일 밤 서울 서초구 잠원동 ‘부에노스아이레스 와인’(02-3444-6634). 아르헨티나 음식 및 와인전문 식당인 이곳에서 손님들이 와인 잔을 손에 든 채 삼삼오오 지하 댄스플로어로 자리를 옮겼다.

아르헨티나 남녀 댄서가 영화 ‘여인의 향기’의 음악으로 쓰였던 ‘포르 우나 카베차(Por Una Cabeza·말 머리 하나의 근소한 차이)’에 맞춰 탱고를 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브라소(서로를 껴안는 홀딩 자세)’에서 시작해 다리로 서로 고리를 만드는 ‘간초’, 다리가 바닥에서 허공으로 들리는 ‘볼레오’ 동작을 했다. 상체를 밀착하고 리듬에 몸을 맡긴 모습이 완벽한 소통을 이루는 듯했다.

‘여인의 향기’에서 관록의 배우 알 파치노가 연기한 프랭크란 인물은 탱고에 서툰 여자 도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탱고를 추는 걸 두려워 할 필요는 없소. 인생과 달리 탱고는 실수가 없소. 혹 실수를 한다고 해도 다시 추면 되니까.”

많은 이들에게 선율이 익숙한 ‘포르 우나 카베차’의 내용은 이렇다. 사기꾼인 남자가 자신의 애인을 등쳐 인생의 반전을 꿈꾼다. ‘(내 인생에서 사기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애인의 돈을 갖고 경마장을 찾은 남자. 하지만 그가 돈을 건 말은 안타깝게도 경주에서 마신(馬身) 하나도 아니고, 말 머리 하나의 차이로 경기에서 진다. 아, 인생이란….

국내에서는 가수 비와 이효리가 함께 탱고를 추고, 피겨 스케이팅의 여왕 김연아가 ‘록산의 탱고’ 음악에 맞춰 얼음판을 지치면서 탱고가 밝고 관능적인 춤으로 부각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본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밀롱가(탱고를 추는 장소)에선 세상사의 시름을 달래거나 따뜻한 인정(人情)을 갈구하는 남녀가 서로를 안고 탱고를 췄다. 사창가에선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며 남자들끼리 춤추기도 했다.

탱고의 발전사는 흥미롭다. 하층민의 문화였던 탱고는 1900년대 초반 유럽의 상류사회로 전파돼 기존의 음울한 이미지에 귀족적이고 화려한 색채를 덧입은 뒤 본국인 아르헨티나로 역(逆)수출됐다. 2000년대 초반엔 ‘고탄 프로젝트’란 뮤지션 그룹이 전자음악(일렉트로닉) 탱고 앨범을 크게 유행시키며 탱고를 가장 트렌디한 월드 뮤직의 반열에 올렸다.

글=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cky@donga.com

여인의 향기 vs 집시의 애환

탱고와 플라멩코

○ 어른을 위한 유혹, 그리고 배려

국내 보석 브랜드인 ‘주얼 버튼’을 이끄는 디자이너 홍성민(41) 장현숙(42) 씨 부부는 몇 년 전부터 지인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사옥 3층에서 탱고를 춘다. 외교관, 회계사, 의사 등 다양한 직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탱고를 즐긴다.

탱고의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이 200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푸블리카 광장에서 연 무료 음악회 실황 공연 앨범인 ‘탱고 아르헨티나’ DVD를 틀며 홍 씨가 말했다.

“탱고는 어른을 위한 춤이자, 배려하는 춤이에요. ‘땅게로(탱고를 추는 남자)’가 리드하면 ‘땅게라(탱고를 추는 여자)’는 물 흐르듯 반응하죠. 서로를 배려해야 스텝이 엉키지 않아요. 춤출 때 느끼는 농후하고 진한 감정은 보석을 디자인하는 마음가짐과 비슷해요.”

아내 장 씨는 탱고를 출 때 쓰는 옷과 구두를 여러 개 꺼내 보여줬다.

금박 장식이 화려하게 박힌 미니 드레스와 검은색 미니 드레스는 ‘H&M’에서, 턱시도 셔츠 디자인인 남편의 분홍색 셔츠는 국내 남성복 브랜드에서 산 것이었다. 색상이 화려한 탱고 구두는 도매상을 통하면 5만 원 정도에 살 수 있는데, 멋쟁이 아나운서들은 밑창이 가죽인 이 구두에 고무 깔창을 대 파티처럼 특별히 멋 내고 싶은 날에도 신는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왜 탱고를 즐길까.

“탱고는 골프나 스키와 달리 음악만 있으면 어디서든 춤을 출 수 있잖아요. 반도네온(탱고 연주에 자주 쓰이는, 아코디언과 비슷한 손풍금) 음악은 또 얼마나 듣기 좋은가요.”

탱고는 아르헨티나 탱고와 컨티넨털 탱고로 구분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생한 아르헨티나 탱고가 유럽으로 건너가 왈츠처럼 댄스스포츠의 한 종목으로 자리잡은 게 컨티넨털 탱고다. 이 때문에 컨티넨털 탱고는 유러피안 탱고 또는 인터내셔널 탱고로도 불리며, 댄스경연대회를 위한 쇼 성격이 짙다.

이희선 한국댄스스포츠협회장은 “탱고는 음악 리듬에 맞춰 파트너와 함께 걷는 게 기본 동작이기 때문에 걸을 수 있다면 누구나 출 수 있다”며 “탱고의 ‘슬로(slow), 퀵(quick)’ 박자는 한국의 ‘쿵 짝’ 장단과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한국댄스스포츠협회(02-584-6588)는 매주 토요일 서울 서초구민체육센터에서 탱고 강습회를 연다. 서울 명지대 사회교육원(02-300-1805)은 댄스 스포츠 지도자 과정에서 탱고를 가르친다. 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탱고 바 ‘땅게리아 델 부엔 아이레’(02-3446-8264)는 아르헨티나의 밀롱가처럼 일반인들이 모여 탱고를 추고, 탱고 교습도 진행된다.

○ 삶을 대하는 열정과 기다림의 자세

일본 영화 ‘도쿄 타워’에서 유부녀 기미코는 머리에 빨간 장식을 하고 무대 위에서 열정적으로 플라멩코를 춘다. 그녀와 불륜을 나누는 연하의 애인이 이 모습을 객석에서 바라본다.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플라멩코를 배우느냐”는 애인의 질문에 기미코는 이렇게 말한다. “넌 모를 거야. 서른다섯 살 여자의 욕망…. 절대로 몰라.”

여자의 욕망은 다양한 빛깔이다. 젊어보이고 싶은 욕망,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싶은 욕망, 여성의 매력을 영영 잃고 싶지 않은 욕망…. 하긴 플라멩코란 말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아 아랍어로 ‘도망 다니는 농부’인 ‘펠라그 멩구(felag mengu)’란 말도 있지만, 노래와 춤이 강렬해 독일어로 ‘불길이 타다’란 뜻의 ‘플라멘(flammen)’이란 주장도 있다.

22일 플라멩코 수업이 열린 서울 서초구 잠원동 코리아플라멩코협회(02-747-7460). 토요일 오후 황금시간을 쪼개 플라멩코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은 외국계 은행원, 교환교수로 한국에 온 일본인 등 20∼50대 여성뿐 아니라 남자 대학생과 백발이 성한 60대의 남자 사업가도 있었다. “플라멩코 드레스가 예뻐서”, “스페인 여행을 갔다가 스페인의 매력에 빠져서” 등 플라멩코를 시작한 계기는 각기 다양했다.

초급반 수업은 발 구르기와 박수 치기 등 리듬감을 익히는 것부터 시작된다. 플라멩코는 12박자 이상의 진행 속에 몇 개의 강한 박자를 가진 구조이기 때문이다. 춤추는 도중 격려 차원에서 외치는 ‘올레(Ole·잘 한다)’ 등 감탄사도 가르친다.

스페인에서 플라멩코 공연이 열리는 ‘타블라오(tablao)’란 장소는 한국의 마당극 마당을 연상케 한다. 춤사위는 자유롭고, 관객들은 무희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추임새를 넣는 축제의 공간이다.

롤라 장 코리아플라멩코협회장은 “플라멩코는 육체와 정신의 에너지가 강렬한 춤”이라며 “경쾌한 분위기보다는 고통 어린 몸부림과 탄식을 표현할 때가 많다”고 했다.

탱고와 플라멩코는 스페인어가 근간이고, 춤과 음악이 어우러지며, 각각 이민자와 집시의 설움을 다뤘다는 점에선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위상은 다르다.

월드뮤직의 바이블로 통하는 ‘러프 가이드(The Rough Guide)’ 시리즈를 국내에 소개하는 씨앤엘뮤직의 류진현 과장은 “탱고는 힙합과 랩을 접목하는 등 여러 시도를 통해 코스모폴리탄 문화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반면, 플라멩코는 스페인에서조차 관광객을 위한 문화로 박제(剝製)처럼 굳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탱고 가수 오스카르 페라리는 “당신이 돌아오는 그 밤에, 내 영혼을 별빛으로 치장할 테고 내 마음은 꽃이 돼 사랑의 이슬 아래 있을 거예요”라고 노래 불렀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던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가 떠오른다. 그래, 어려울수록 희망이 값질 테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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