퀀텀 오브 솔러스는 전편 라스트신 1시간 뒤 시점에서 시작한다. 영화는 숨 막히는 액션에 이어 007을 냉소적인 바람둥이로 만든 실연의 아픔을 보여준다. 사진 제공 소니픽쳐스
■ 22번째 007시리즈 ‘퀀텀 오브 솔러스’ 내달 개봉
007의 재구성.
11월 5일 개봉하는 ‘007 퀀텀 오브 솔러스’(15세 이상 관람가)는 전편 ‘카지노 로얄’(2006년)에서 시작한 파격을 완성한 22번째 007 시리즈다.
제1편 ‘살인번호’가 만들어진 지 46년. 007의 ‘변신’에는 과거에 상상하기 어려웠던 흥행의 압박이 작용했다.
시사회가 열린 영국 런던에서 26일 만난 제작사 관계자는 “1990년대까지 늘 평균 이상 성적을 내는 효자 상품이었던 007 시리즈였지만 2002년 ‘어나더 데이’ 이후에는 손익분기점을 걱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위기 극복을 위해 전편에서 탈바꿈한 007 이미지를 굳히려고 한 영화다. MGM의 사자 로고가 울부짖자마자 들이대는 자동차 추격전은 이 시리즈의 리모델링 방향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격렬한 도로 총격전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잔인하게 적을 제압하는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 “휘젓지 않고 가볍게 흔들어 섞은 마티니” 같은 선배 007의 느끼한 대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고 생각보다 행동이 우선한다. 앞뒤 없이 날뛰다가 같은 편을 죽이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본드의 적은 범죄단체나 다른 나라 첩보기관, 악덕 재벌이나 북한이 아니다. 그는 오직 전편 ‘카지노 로얄’에서 만났던 여자친구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106분간 폭주한다.
익히 알고 있는 007은 40여 년 동안 냉정과 위트를 잃지 않으며 여유 만만한 고수의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크레이그의 007은 애인의 복수를 위해 상사 M(주디 덴치)의 지시에도 대든다. M이 “용의자를 생포하라”고 하는데 본드는 콧방귀도 안 뀐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고하지만 그의 살인은 다분히 개인적인 화풀이로 보인다.
전통적 007의 기본기는 세련미였다. 관객이 이 시리즈에 기대하는 것은 신기한 첨단 무기와 화려한 액션, 섹시한 ‘본드 걸’이었다.
하지만 ‘퀀텀 오브 솔러스’에는 어떤 첨단 무기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국첩보기관 MI6 본부의 화려한 프레젠테이션 시스템 정도가 눈에 띈다. 2명의 본드 걸이 나오지만 존재감이 없다.
그 대신 이 영화는 ‘007이 냉혈한 바람둥이가 된 46년 전의 사연’에 초점을 맞췄다. 1989년 ‘살인면허’에서 상어에게 하반신을 물어뜯긴 미 중앙정보국(CIA) 소속의 친구 펠릭스(제프리 라이트)를 등장시킨 것에서도 007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런 심리적인 동기부여는 최근 각광받은 첩보물 ‘본’ 시리즈가 이미 보여준 것. ‘퀀텀 오브 솔러스’의 과격 액션은 “세계 최고의 첩보원은 제이슨 본(맷 데이먼)이 아니라 007”이라고 주장하지만 크레이그의 슬픔에는 데이먼만큼 절절한 느낌이 없다.
새 007은 액션의 강도로만 따지면 별 후회가 없을 영화다. 쉼 없이 몰아치는 액션에 빠져 있다 보면 폭탄주 몇 잔을 거푸 들이켠 것처럼 몽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