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의&joy]‘우리땅 걷기 도사’ 신정일

  • 입력 2008년 7월 11일 02시 59분


낮엔 땅 위의 길 걸으며 꿈꾸고

밤엔 책 속 거닐며 별을 헨다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 신경림의 ‘집으로 가는 길’ 전문》

● 한강 낙동강 금강 등 8대강 두 발로 걸어

신정일(54) 씨는 걷기도사다. 우리 땅 구석구석 발길이 안 닿은 데가 없다. 남한 8대강(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만경강 동진강 한탄강)을 발원지에서 하구 끝까지 걸었다. 그것도 한강은 3번, 금강 섬진강은 2번씩이나 걸었다. 김포에서 태백까지 한강걷기에는 딱 16일이 걸렸다. 낙동강 16일, 금강 14일, 섬진강 9일, 영산강 5일, 한탄강 만경강 각각 3일, 동진강 2일.

조선시대 옛길 영남대로(부산 동래읍성∼서울 숭례문), 삼남대로(전남 해남 이진∼서울 숭례문), 관동대로(서울 흥인문∼강원 울진 평해)와 동해안 트레일(부산 해운대 달맞이고개∼강원 고성 통일전망대) 걷기도 마쳤다. 그뿐인가. 크고 작은 산도 400여 개나 올랐다. 요즘엔 그가 대표로 있는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회원들과 시도 때도 없이 길을 떠난다.

지금까지 신 씨가 25년 넘게 헤맨 거리는 공식적으로만 1만6000여km. 전국을 무른 메주 밟듯 다녔다. 늑대보다 사나운 개에게 물릴 뻔한 적도 여러 번, 어디를 가든 국적불명의 개가 60만 대군보다 많았다. 으르렁거리며 질주하는 화물차에 치일 뻔한 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래도 ‘용케 살아남아’ 굳건히 걷고 있는 게 신통방통하다.

신 씨는 몸(170cm, 60kg)이 ‘그 정한 갈매나무처럼’ 단단하다. 마라톤 선수 몸 같다. 걸음걸이도 가볍고 날렵하다. 경공술이 강호의 고수처럼 리드미컬하다. 그는 개량 한복차림에 랜드로버 신발을 신고 길을 나선다. 하루 평균 40km, 시속 5∼6km의 빠르기로 걷는다. 배낭 무게 13kg. 잘 곳을 못 찾아 하루 64km를 걷다가 기진맥진한 적도 있다.

“사흘만 걸으면 보약 한 제 먹는 것보다 낫다. 처음엔 근육이 적응할 수 있도록 천천히 걷는 게 좋다.

사나흘 지나면 다리 근육에 힘이 붙는 것을 느낀다.

이때부터는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그냥 가면 된다. 오래 걷다 보면 여기저기 통증이 있기 마련이지만 일단 몸을 움직여 걷다 보면 씻은 듯 사라진다. 난 평생 병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다. 건강진단이니 하는 번거로운 것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루 세끼 뚝딱 잘 먹고 시원하게 변을 잘 보는데 뭐가 문제이겠는가?”

● 정규교육은 초등학교가 전부인 만물박사

신 씨는 초등학교 이후 학교 문턱을 밟은 적이 없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 상급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교복 입은 친구들만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저 책에 걸신이 들려 닥치는 대로 활자에 코를 박고 읽고 또 읽어댔다. 행상하는 어머니를 도우면서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과정은 검정고시로 마쳤다. 한때는 출가도 해봤지만 두 달만에 ‘귀향조치(?)’ 당했다. 25세 무렵 막노동으로 공사판을 헤맸다. 일당 4만 원. 그 돈으로 책을 사서 게걸스럽게 외우고 뼈에 새겼다. 결국 그를 키운 건 8할이 책과 산, 들, 바다였다.

그가 읽은 책은 과연 얼마나 될까? “1만 권인지 2만 권인지…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냥 책 읽고 뭔가 하나라도 얻었으면 그만이지….”

전북 전주시 덕진동에 있는 27평 아파트는 그의 집필실이자 서재다. 3개의 방뿐만 아니라 거실 창고 등 책이 가득가득하다. 방바닥 여기저기에도 책이 걸려 발 딛기도 힘들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무아지경 책 속을 거닌다. 그리고 뭔가 떠오르면 수시로 끼적인다. 아내와 아이들(2남 1녀)이 사는 살림집은 다른 곳에 있다.

그는 걷지 않는 날엔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11시까지 꼬박 즐거운 책 감옥에 갇혀 있다. 하루 1∼3권 책 읽기는 보통이다. 그는 지금까지 책을 무려 35권 넘게 썼다. 베스트셀러도 많다. 한마디로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다. 뭐든 물어보면 척척 답이 나온다. 검색이 필요 없다. 가히 ‘인간 포털’이라고 할 수 있다.

“난 강가를 따라 걸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강은 인생과 비슷하다. 강은 수많은 우연을 거쳐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다. 강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서 단맛 쓴맛 모든 것을 경험한다. 강물 소리엔 삼라만상 모든 소리가 녹아 있다. 아마도 난 책이 없었으면 이 세상에서 진작 사라졌을 것이다. 낮엔 늘 지상의 길을 걸었고 밤엔 책 속을 거닐었다. 자연 속을 걸을 땐 그 속에서 수많은 책을 읽었고 책 속을 걸을 땐 거기에서 새소리를 듣고 붉은 노을을 보았다. ‘좋은 책은 도끼로 나의 두개골을 내려치듯 한다’는 카프카의 말에 절대 동감한다.”

신 씨의 꿈은 강해설사다. 강해설사는 그가 만든 말이다. 강물 따라 걸으며 사람들에게 거기에 얽힌 역사 문화 등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설악산 지리산은 국립공원이 되는데 왜 한강 낙동강은 안 되는가?”라고 반문한다. 5대강을 특별문화재로 지정하고 강박물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남북 잇는 동해안 1300km는 세계최고 도보코스”

신 씨는 이제 반쪽 남한 땅이 너무 좁다. 북한의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청천강 예성강을 따라 걷고 싶다. 의주로(서울∼신의주)를 따라 만주를 거쳐 연암 박지원이 갔던 열하까지 걷고 싶다. 동해안 트레일의 나머지 구간(강원 고성 통일전망대∼두만강 녹둔도)도 하루빨리 잇고 싶다.

“설악산 금강산 명사십리 칠보산 등 굽이굽이 절경인 동해안 트레일 1300km는 세계 최고의 걷기 코스다. 스페인 산티아고 800km 순례길보다 몇 배나 더 황홀한 길이다. 남북이 합의만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개발할 수 있다. 우선 남한 쪽의 절벽이나 공장 등 때문에 끊긴 길부터 잇는 게 중요하다. 지방자치체들이 협력해서 여행자 숙박업소도 짓고 인증서도 발급해 준다면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길을 가는 사람은 모두 도반(道伴) 즉, 길동무다.

도반은 앞에 가던 사람이 뒤처질 수 있고 뒤에 가던 사람이 앞설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다투지 않는다.

뒷덜미를 잡아채거나 등 떠밀지 않는다. 그냥 강물처럼 묵묵히 아래로 흐를 뿐이다. 신정일 씨도 그렇게 강물처럼 담담하게 흘러간다.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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