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죽음… 두려움… 3년간 처절히 부딪쳤죠”

  • 입력 2008년 6월 19일 02시 56분


■ 다섯번째 소설집 낸 조경란 씨

“너는 마치 책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구나.”

2년 전 독일 베를린의 한 시장에서 부딪친 늙은 여인이 무심코 건넨 말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떠오른 문장을 손등이며 팔에 써둔 게 이방 노파의 눈엔 낯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슬럼프에 빠져 있던 그에게 그 말은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암시였다. 귀국 후 그 경험을 붙들고 쓴 단편이 ‘버지니아 울프를 만났다’다. 상처를 가진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책으로 쓰기로 결심하게 되는 이야기다.

등단 13년 된 소설가 조경란(39·사진) 씨가 다섯 번째 소설집 ‘풍선을 샀어’(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버지니아 울프를 만났다’를 비롯해 3년의 혹독했던 슬럼프 동안 쓴 8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16일 서울 종로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작품마다 스민 경험을 털어놓았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일본 도쿄 등지를 떠돌며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여기 담긴 소설들은 글쓰기 죽음 두려움이란 세 주제를 가지고 있어요. 작품이 써지지 않아 ‘이빨로 책상을 물고 늘어지는’(카프카) 고통을 참으며 쓴 작품들이죠.”

사라진 남편을 찾아 낯선 도시로 온 여인을 담은 ‘형란의 첫 번째 책’에 나오는 삽화(남편이 삽으로 등을 찍으며 ‘너는 늙고 실패했다’고 외치는 꿈)는 작가가 꾼 꿈 내용이다. “죽음보다 ‘늙고 실패했다’는 슬픔이 커서 깨고 나서도 엉엉 울었다”는 그는 “제목을 차마 ‘경란의 첫 번째 책’으로 할 수 없어 ‘형란’이라고 했을 만큼 내 고민이 묻어 있다”며 웃었다.

‘마흔에 대한 추측’에는 여자와 예술가로서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투영됐다.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이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문제를 직시해 나가는 이 이야기엔 “글쓰기, 관계에 대한 크고 작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치유해 가는 내 모습이 배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소설집 한 권으로 묶어 내고 보니 작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그 기간에도 전진하고 있었던 것 같다”며 “더 좋은 소설을 쓰고 싶은 창작의 의지와 자신감을 회복했다”고 말했다.

올가을에 쓰기 시작할 장편에 대해 말하는 그는 즐거워 보였다. “낯선 도시에 간 두 남녀가 ‘소리’에 예민한 제3자를 만나며 겪게 되는 이야기를 쓸 거예요. ”

글=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사진=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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