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지평선]<끝>생명의 발원지 욕망, 긍정과 부정의 조화를 꿈꾼다

  • 입력 2008년 6월 17일 03시 04분


욕망은 살아 있는 것들의 본능이자 생명 현상의 필수 요소지만 지나친 권력욕과 소유욕은 폐해를 낳기 마련이다. 고은 시인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 난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묻는다.
욕망은 살아 있는 것들의 본능이자 생명 현상의 필수 요소지만 지나친 권력욕과 소유욕은 폐해를 낳기 마련이다. 고은 시인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 난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묻는다.
새들이 운다. 이른 아침부터 그 울음소리가 숲 속을 바쁘게 날아다닌다. 멧비둘기와 뻐꾸기가 빗속에서 잘도 운다. 이따금 꾀꼬리도 끼어들어 그 영롱한 소리로 귀가 쟁쟁하다.

새의 수컷은 암컷에게 견줄 바 없이 치장도 화려하다. 닭이나 공작뿐 아니라 딱따구리 수컷도 그렇다. 그럴 뿐만 아니라 새의 수컷은 그 꾸밈새에 더하여 수컷만의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수컷에 대해서 암컷은 도무지 울 일이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수컷이 울어대는 까닭은 암컷을 부르는 소리이기보다 수컷 자체의 영역을 과시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암컷을 유혹하거나 구애하는 소리라고만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

내가 여기 있다, 여기 있으니 그 어느 놈도 감히 내 영역을 침범하지 못한다라는 과시와 경고를 담고 있는 것이 새들의 소리인 것이다. 그 세계에서는 그러므로 소리가 살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서운 소리가 새들의 세계 밖에 있는 인간의 귀에는 지극히 아름다운 소리이고 아름다운 동산에서 들리는 천상의 소리인 것이다.

자신의 영역 안에서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는 생물의 본능은 때로는 자신의 영역 밖까지 넘보는 과잉에 닿아 있기 마련이다.

니체는 인간의 욕망 가운데서 권력 욕망을 으뜸으로 내세워 권력 의지 또는 힘의 의지라는 철학을 이루어 낸다. 이런 권력으로서의 욕망은 심지어 마르크스의 식욕, 프로이트의 성욕에 버금가거나 그것들을 능가하는 강한 본능과 결부된다.

욕망은 본능이다. 아무리 업신여겨도 소용없는 것이 욕망이고 본능의 원천이다.

불교의 삼계(三界)는 욕계, 색계, 무색계로 우주의 구성을 알려준다. 그 가운데서 욕계가 인간이나 다른 생물의 거처인 유정(有情)의 생존권이다.

여기에서 식욕 성욕 수면욕의 세 가지 기본 욕망이 작동한다.

색계 무색계는 욕계를 벗어난 상태의 승화된 물질세계이다. 굳이 말하자면 감각과 의식 밖의 세계일 것이다.

욕계야말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본능이 만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실존적 생물적 욕구만으로 그 단일한 상태를 정의하지 않고 사회적 욕구로 판단하는 복합적 정의가 있어야 한다.

욕망이 식욕 성욕 수면욕이나 배설욕과 활동욕만으로 말해진다면 생물들의 소속 본능과 모방 본능, 자기실현의 본능들이 외면당할 것이 뻔하다. 아니 권력 욕망이나 소유에 대한 궁극 욕망은 얼마나 기본 욕망 이상의 분출이겠는가.

고대 아시아 여러 지역이 낳은 오래된 지혜들은 하나같이 그런 욕망세계를 초월하는 일이나 그 욕망이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장애라고 말해 오고 있다. 그런 주장의 끄트머리는 으레 무욕(無慾)이라는 추상 개념을 다그친다.

그래서 욕망은 낮은 것이고 무욕은 한없이 높은 것으로 값을 매긴다. 불교가 욕망을 마음의 작용이라 하고 채근담이 하늘의 작용이라고 말하는 것들도 끝내는 그 욕망의 졸업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욕심 버리기, 욕심 죽이기를 수행의 으뜸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욕망에 대한 일련의 부정적 강조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런 지혜 따위와 상관없이 욕망의 현장이고 욕망들이 어우러진 시장인 것이다.

아니 인류의 미개시대보다 훨씬 더 욕망의 인성(人性)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세계가 문명의 세계 아니던가. 그러므로 삼계(三界)가 불타는 집(화택·火宅)이라고 외치는 것은 옛날의 말이기보다 지금의 말인지 모른다.

한국 속담이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메운다고 말하는 것은 욕망의 무한을 어떻게 자발적으로 조율하고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담고 있다.

이 점에서 자연계 생물들의 생태가 유지하는 기본 욕망의 균형으로부터 인간의 욕망이 한 수 배워야 할 것이다.

새와 짐승 그리고 벌레들의 세계, 미생물의 세계, 이른바 태란습화(胎卵濕化)의 사생(四生)이야말로 어떤 종교도 지배이데올로기도 필요 없는 그것 자체의 타고난 본능의 ‘자연’으로 ‘윤리’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 인간이라는 자연 대립의 위치에 있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인간의 욕망 발전 때문이다.

인류의 미래, 혹은 지구의 미래는 이 같은 욕망이 어떻게 수정되고 정화되느냐에 그 명운이 달려 있다.

그러나 욕망을 이겨 낼 힘이 점점 더 없어지는 절망이 우리가 사는 후기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자본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이 곧 소유를 의미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소유주의에 다름 아니다.

옛날 아리스토텔레스가 꿈꾼 대로 개혁은 재산의 공평한 분배보다 먼저 욕망을 줄이는 훈련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그런 교훈은 세계 종교들의 흔해빠진 장식이기도 하다. 그것으로 거역할 수 없는 공룡으로 커버린 욕망을 사라지게 만드는 기적은 쉽사리 기대할 노릇이 아니다.

그렇다 해서 그것을 눈 딱 감고 죄악으로 밀어붙여서도 안 될 것이다. 욕망은 생명현상의 요소이다. 그래서 고도의 정신적인 발원(發願)의 세계도 그 밑창은 욕망에 닿아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도리어 욕망을 위대한 행동으로 나아가는 정신의 날개라고 찬미한 괴테의 긍정이 정직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긍정과 함께 이 미쳐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 속에서 새로운 한계 욕망의 종(種)을 낳게 되기를 기대한다. 왜냐하면 욕망의 팽창으로 사는 인간과 욕망의 허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인간이 뒤섞인 어제오늘의 이 사회는 시장이라는 본능만으로 소유욕과 지배욕의 카오스를 이루기 때문이다.

욕망의 이성이 이런 사회의 물질적 광기 앞에서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하는 의식의 사회장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욕망의 무조건적 부정이라는 처사적(處士的) 소아병 역시 그것이 삶의 모든 가능성을 악화시키는 패배주의를 낳을지 모른다.

이 두 개의 난제가 이 세상의 것이다.

고은 시인·서울대 초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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