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없이 東西만남 없었다

  • 입력 2008년 5월 2일 02시 59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 왕궁 유적의 부조. 병사들의 행렬 위로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신인 아후라 마즈다의 상징 장식이 보인다.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 왕궁 유적의 부조. 병사들의 행렬 위로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신인 아후라 마즈다의 상징 장식이 보인다.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 은하문화학교 ‘페르시아 및 이슬람 문화의 이해’의 주제는 ‘실크로드와 페르시아 문화’.

강사로 나선 신양섭 한양대 문화재연구소 연구교수는 페르시아 민족의 인종, 실크로드를 통한 페르시아 문화의 전파, 중국에 미친 영향 등에 관해 설명했다.

신 교수가 먼저 언급한 것은 페르시아인의 인종. 페르시아 문명의 이란 민족은 ‘인도유럽어족’의 일파인 아리안족이다. 기원전 3000년∼기원전 2000년경 아리안족이 이란 고원으로 이주했는데, 대표적인 민족이 메데, 사카, 파르스인이었다. 메데인들이 메디아 왕국(기원전 1000년∼기원전 559년)을 세웠고 스키타이 민족으로 알려진 사카인들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유목 제국을 세웠다. 파르스인들이 바로 아케메네스 왕조를 건설해 찬란한 페르시아 문명을 이뤄낸 민족.

신 교수는 “페르시아인들이 중국과 유럽 사이에서 동서 문명 교류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면서 특히 동서 문명의 종교 교류에 주목했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인도의 불교, 기독교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동으로는 중앙아시아 중국, 서로는 유럽까지 전래되는 데 페르시아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란계 민족인 소그드인들이 실크로드를 무대로 중국과 로마 사이의 중개 무역에 종사하면서 종교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후 7세기에 이르는 1000년간 페르시아인들의 정신을 지배한 조로아스터교는 당대 이란인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7세기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이슬람제국 시대가 시작된 지 1400여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이란 곳곳의 사원에선 조로아스터교 최고의 신 아후라 마즈다의 장식을 만날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4세기 초 아케메네스 왕조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한 뒤 주춤했다가 서기 3세기 사산조 페르시아가 국교로 채택하면서 번창했다. 조로아스터교는 중국까지 전파돼 621년 수도 장안(長安)에 조로아스터교 사원이 세워질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마니교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뿐 아니라 로마 제국, 유럽,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까지 전래됐다. 중국 측천무후가 마니교에 호의를 보여 장안에 대운사(大雲寺)라는 사원까지 생겼다. 당 왕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중국 각지에 마니교 사원이 생겨나면서 불교와 융합됐다. 현재 중국의 마니교 사원에 있는 마니의 모습이 불상과 비슷한 것은 이 때문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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