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 한국’ 이젠 바로잡자]<4>문화계 표절 불감증

  • 입력 2007년 2월 2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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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억울하고 미칠 것 같았어요. 계속 우니까 엄마 아빠가 너무 안타까워하셔서 집을 나와 호텔에 있었어요. 호텔에서 3일간 밖에 나가질 못했어요.”

지난해 2집 타이틀곡 ‘겟차(Get Ya)’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노래 ‘두 섬싱(Do something)’을 표절했다는 의혹으로 활동을 잠시 중단했던 가수 이효리 씨는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시의 심경을 이같이 밝혔다.

이 사건은 과거의 표절 시비와 양상이 달랐다. 과거엔 외국곡 원작자의 이의 제기가 거의 없었다. 이번엔 ‘두 섬싱’의 원작자가 한국에서 저작권을 대행하는 업체에 “부분적으로 표절로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는 의견을 보내와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 사건은 AP통신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조규철 유니버설 퍼블리싱 코리아 대표는 “국내에 외국곡 작곡자의 저작권 보호 대행업체가 생겨 표절을 감시하고 있다”면서 “이효리 씨는 논란이 일자 2집 활동을 중단해 더는 문제 삼지 않았지만 대부분 저작권을 100% 환수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한다”고 말했다.

○ 모든 것을 잃는 표절의 혹독한 결과

올해 초 시인이자 소설가인 연세대 마광수 교수가 시집 ‘야하디 얄라숑’(해냄)에 제자와 문학 지망생이 쓴 시 두 편을 자기 이름으로 실은 것이 드러나 큰 충격을 줬다. 가요계도 새해 초부터 배우 문근영 씨가 한 CF에서 부른 ‘&디자인’이란 노래가 가수 조덕배 씨의 ‘나의 옛날이야기’를 표절했다는 의혹으로 들끓었다.

표절 의혹 당사자들은 대부분 “우연의 일치”라거나 “문제가 된 원작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발뺌한다. 그러나 외국에선 ‘비의도적 표절’까지도 엄격히 단죄한다.

1976년 비틀스 출신의 가수 조지 해리슨 사건이 대표적이다. 1970년 전미(全美) 차트 1위에 오른 노래 ‘마이 스위트 로드(My sweet lord)’가 그룹 시폰스의 ‘히즈 소 파인(He's so fine)’을 표절했다는 소송에서 해리슨은 “맹세코 의도성이 없었고 우연의 일치였다”고 호소했다. 법원은 “무의식적으로 했더라도 결과가 같다면 표절”이라며 40만 달러 배상 판결을 내렸다.

1998년 영국 밴드 ‘더 버브(The Verve)’는 ‘비터스위트 심포니’라는 곡 가운데 네 마디를 롤링 스톤스의 ‘더 라스트 타임(The last time)’에서 빌려 왔다. 하지만 사전에 곡의 사용 허락을 받지 않아 수익금 전부를 롤링 스톤스에게 바쳐야 했다.

가요평론가 임진모 씨는 “외국에선 표절로 판정나면 모든 게 끝일 정도로 징벌이 혹독하다”며 “도덕적 타격은 말할 것도 없고 저작권은 물론 음반 판매 수익 전부를 원작자 측에 고스란히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몇 마디만 베끼고 나머지는 순수한 창작이더라도 수익 배분이나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가수 이승기 씨의 ‘가면’이 미국 록 밴드 ‘마룬 5’의 ‘디스 러브’와 표절 시비가 일어 저작권 지분 100%를 넘겨 주는 조건으로 원작자에게서 ‘사후승인’을 받기도 했다.

○ ‘잠시만 속이면 대박’, 돈 욕심이 표절을 부른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면서 전체를 참고하지 않더라도 설정을 빌려오면 창작하기가 매우 편하다. 외국의 B급 영화 수십 편을 보면서 괜찮은 장면들을 발췌해 짜깁기하거나 설정만 바꿔 한국식으로 만들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한 시나리오 작가)

창작의 고통을 겪거나 모험할 필요가 없이 이미 검증된 틀을 이용해 안전한 수익과 인기를 얻으려고 할 때 표절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잠시만 속이면 대박, 걸리면 장난’이란 인식이 잇단 표절을 부르고 있다.

방송국이 쇼 프로그램을 개편할 때마다 일본 방송국 프로그램을 표절했다는 시비가 반복되고 있지만 시청률만 높으면 표절 시비는 유야무야되기도 한다. 가수 이효리 씨는 ‘겟차’ 의 표절 논란 이후에도 22억여 원의 계약금을 받고 소속사를 옮겨 삼성 애니콜 CF ‘애니스타’로 인기가 더 높아졌다.

가수들에 대한 표절 시비가 제기되면 팬클럽들은 “안티들은 꺼져라” “남들 다 하는데, 왜 우리 오빠만 갖고 그러느냐”며 똘똘 뭉친다. 이런 현상을 꾸짖는 사람이나 기구도 없어 일부 청소년에게는 표절에 관한 도덕 불감증이 번져 있다.

표절은 피해자가 고소해야 죄가 되는 이른바 ‘친고죄’다. 아무리 논란이 거세도 원작자가 대응하지 않으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난다. 1999년 공연법의 개정으로 곡의 표절 여부를 사전심사했던 공연윤리위원회가 없어져 표절 곡의 사전 제어장치는 사라졌다.

문화관광부는 최근 문화계와 법조계에 용역을 의뢰해 장르별 ‘표절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가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자율 규제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표종록 변호사는 “표절 논란의 공론화는 한국 사회의 문화 수준이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한류 문화상품이 세계로 나가고 있어 앞으로 표절 논란은 세계적 소송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팀장

이인철 교육생활부 차장 inchul@donga.com

▽국제부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

▽교육생활부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사회부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문화부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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