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 ‘낙서’ 안 한듯 지운다

  • 입력 2007년 2월 14일 02시 58분


‘삼전도비(사적 101호) 표면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붉은색 스프레이로 쓴 글씨를 감쪽같이 지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비에 누군가 붉은색 스프레이로 ‘철거’ 등의 글씨를 써 넣어 표면을 훼손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만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에서는 이 글씨를 지우고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한 묘안을 찾는 데 여념이 없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패배한 뒤 청의 요구에 따라 1639년 세운 석비(石碑)로 청 태종의 승전(勝戰) 내용이 새겨져 있다. 높이는 3.95m. 누군가가 비 몸체인 비신(碑身)의 앞뒷면에 ‘철’, ‘거’, ‘병자’, ‘370’ 등의 글씨를 써 놓았다. 비신 아래쪽 거북 모양의 받침돌에도 붉은색 스프레이를 진하게 뿌려 놓았다.

삼전도비를 살펴본 문화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 관계자들은 거북 모양 받침돌의 스프레이 선을 지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받침돌은 강도가 높은 화강암이어서 유기용제(페인트를 녹여 없애는 물질)로 붉은색 선을 닦아내도 표면이 훼손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리석 재질인 몸체. 강도가 약한 대리석이다 보니 글씨를 닦아 내는 과정에서 표면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삼전도비 몸체의 대리석은 보통의 대리석보다도 강도가 더 약한 것 같다”면서 “아마도 병자호란 직후 치욕스러운 이 비를 세울 때, 빨리 비바람에 마모돼 사라져 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약한 대리석을 사용한 것 같다”고 흥미로운 추론을 내놓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작업의 핵심은 삼전도비 몸체의 표면을 전혀 훼손하지 않고 감쪽같이 글씨를 지우는 것. 문화재연구소의 이규식 보존과학실장은 “비신의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 스프레이 페인트 글씨를 문질러 지우는 것이 아니라 페인트를 녹여 없애는 방식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마치 범죄수사 드라마인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에서처럼 과학적 분석 과정을 거칠 예정이다.

우선 비의 표면에 칠해진 스프레이 페인트의 성분을 분석할 예정이다. 페인트의 성분을 알아야 그것을 녹일 수 있는 유기용제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 삼전도비에 뿌려진 스프레이 페인트와 동일한 성분의 페인트를 대리석에 뿌린 뒤 유기용제로 페인트를 녹여 없애는 실험을 진행하게 된다. 이 실험을 거쳐야만 페인트가 과연 어느 정도 녹아 없어지는지, 녹은 페인트를 어떤 방식으로 빼내는 것이 가장 적절한지 등을 판단할 수 있다.

이 같은 준비와 실험이 끝나면 3월 말부터 현장을 찾아 비석 표면의 붉은색 글씨를 없애는 작업에 들어간다. 먼저 스프레이로 쓴 글씨만 남겨 두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가린다. 유기용제를 천에 묻혀 일일이 글씨 위를 꾹꾹 누르면서 페인트가 녹아 묻어나도록 한다. 비신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 이 과정에서 천을 문지르는 행위는 절대 금물이다. 두세 명이 투입될 경우 현장 작업은 10∼15일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송파구는 이번 작업을 위해 14일 오전 삼전도비 주변에 높이 6m의 차단막을 설치한다고 밝혔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