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3년 소련 중령 우발적 핵전쟁 차단

  • 입력 2006년 9월 26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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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삑∼ 삑∼.’

1983년 9월 26일 0시를 조금 넘긴 시간, 소련 모스크바 남부 위성통제센터의 컴퓨터 시스템에서 요란한 경보가 울렸다. 군사위성이 보낸 조기경보였다. 경보는 미국 핵미사일이 소련을 향해 발사됐다는 가공할 내용을 알리고 있었다.

당직 장교였던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중령은 컴퓨터 시스템의 오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이 핵전쟁을 도발하려 한다면 미사일 한 발만 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소 양국은 이른바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논리에 입각한 ‘공포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한쪽이 선제공격을 감행할 경우 핵미사일이 대륙을 건너오기 전에 포착해 즉각 대량 보복 공격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 도발은 곧 공멸을 의미했다.

일단 핵무기로 선제공격이라는 모험을 하기로 작심했다면, 핵미사일을 한꺼번에 대량 발사하는 게 상식이었다.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가는 사이, 상황은 다시 심각해졌다. 두 번째 미사일이 발사됐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경보음은 거의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컴퓨터엔 이미 ‘개시’ 버튼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당장 반격 조치에 들어가야 한다는 신호였다.

최고지도부에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판단할 시간은 불과 몇 분. 그의 보고 몇 마디로 반격 여부가 결정될 것이었다. 페트로프는 컴퓨터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짧지만 긴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직감을 믿기로 했다. “위성 경보는 잘못된 것입니다.”

반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 속에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그의 결단은 옳은 것으로 판명됐다. 위성시스템이 구름에 반사된 햇빛을 적 미사일로 오인한 것이었다.

만약 페트로프가 단순히 근무수칙대로만 행동했다면? 수억의 인명피해와 기나긴 핵겨울….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 전개됐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는 냉전 후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시기였다. 그해 초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칭했고, 불과 3주 전엔 KAL 007기 격추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페트로프는 가혹한 경위조사를 받았다. 칭찬도, 처벌도 없이 조사는 마무리됐지만 그는 한직으로 옮겨갔다가 조기 전역해야 했다.

인류를 우발적 핵전쟁으로부터 구한 ‘무명의 영웅’ 얘기는 10년 뒤 소련 장성의 회고록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페트로프는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한 일은 없다. 마침 그때 내가 있었을 뿐이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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