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럭비의 마력… “내 삶의 룰은 팀워크다”

  • 입력 2006년 7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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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스터즈’ 선수들의 국적은 영국,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 제각각이지만 럭비 하나로 뭉쳤다. 학창 시절 배운 럭비가 하고 싶어 팀을 꾸렸다. 상대가 없어 자기들끼리 경기를 하기 때문에 한국에 여자 럭비팀이 탄생하길 고대하고 있다.
‘서울 시스터즈’ 선수들의 국적은 영국,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 제각각이지만 럭비 하나로 뭉쳤다. 학창 시절 배운 럭비가 하고 싶어 팀을 꾸렸다. 상대가 없어 자기들끼리 경기를 하기 때문에 한국에 여자 럭비팀이 탄생하길 고대하고 있다.
주한 외국인 어린이와 청소년으로 구성된 ‘한강 해적’은 매주 토요일 서울 여의도 한강둔치에서 럭비 연습을 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주한 외국인 어린이와 청소년으로 구성된 ‘한강 해적’은 매주 토요일 서울 여의도 한강둔치에서 럭비 연습을 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또 태클이다. 금발의 여자 선수는 잠시 몸을 휘청하더니 잔디 위로 나뒹굴었다.

“방금 봤소? 다리 쪽으로 파고드는 과감한 태클…. 햐~ 참, 여자들이지만 제대로 배웠네.”(김재택 대한럭비협회 사무국장)

22일 경기 안산시 호수공원 잔디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종별 럭비선수권대회 시범경기. 아마추어 여성 럭비의 진면목이 펼쳐졌다.

‘선수’들은 전원 20대 외국인 여성 영어교사로 이뤄진 ‘서울 시스터즈’ 소속. 국내에는 상대할 여자팀이 없어 A, B팀으로 나눠 ‘그들만의 경기’를 했다. 하지만 몸놀림은 이날 날씨만큼이나 밝고 쾌활했다. 브래지어 차림으로 유니폼을 갈아입는 모습에서 건강미가 물씬 풍겼다.

땀에 흠뻑 젖은 에밀리 버터워스(26·서울 오류중 교사) 씨는 “내년 프랑스에서 열리는 럭비 월드컵 본선에 한국이 일본을 꺾고 진출해야 할 텐데(럭비를 즐기는 사람이 적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서울 시스터즈 멤버들의 국적은 다양하다.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하지만 매주 일요일이면 한강변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씨름하며 땀을 흘린다.

작년 여름엔 한국에 사는 외국기업 주재원들이 6~18세 자녀로 구성된 유소년 럭비팀 ‘한강 해적(Han River Pirates)’을 만들었다.

이런 척박한 풍토 속에서 7월 1일엔 선수 경험이 없는 순수 국내 동호인으로만 이뤄진 럭비팀 ‘하카’가 태어났다. 럭비가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는 날은 과연 올 것인가.

○그들은 왜 럭비를 하는가

“닉, 탐, 베스, 조지아. 여의도에 갈 준비해라.”

40대 중반인 제러미 벅스 다우코닝코리아 부사장은 매주 토요일이면 여의도 한강둔치에서 4남매가 소속된 ‘한강 해적’의 코치가 된다. 부인 줄리아도 이 팀의 창단 주역이다.

“영국, 벨기에, 프랑스에서 근무할 때는 아이들이 럭비 서클에 가입해 활동했는데 한국에서는 럭비를 하는 청소년을 보기 힘들더군요. 그래서 아예 팀을 만들었죠.”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럭비 인기가 높은 영연방 국가에서 온 학부모들이 특히 반겼다. 조지프 데이 주한영국상공회의소 부회장은 “9세 된 딸이 토요일만 되면 여의도에 데려가 달라고 조른다”고 말했다.

거칠게만 느껴지는 럭비를 팀까지 만들어 즐기는 이유는 뭘까. 한국에선 럭비를 할 장소도 구하기 힘든데….

이들은 럭비가 그 자체로 재미있을 뿐 아니라 교육 효과도 크다고 말한다. 심판으로도 활동하는 데이 부회장은 “럭비에는 야구의 투수나 미식축구의 쿼터백처럼 중심 역할을 하는 포지션이 없다”며 “팀원 전원이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이길 수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자신도 어린 시절 럭비를 하면서 팀워크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회상했다.

럭비의 또 다른 매력은 ‘내 능력으로 나름대로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자신감. 다른 스포츠와 달리 팀원 모두가 빠르고 힘이 셀 필요가 없다. 몸놀림이 빠른 선수는 공을 배급하고, 완력이 좋은 선수는 스크럼을 짜 공을 지키면 된다.

벅스 부사장은 “아들 닉은 럭비가 전투처럼 느껴져 좋다고 한다. 모두가 힘을 합하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라고 했다.

대한럭비협회 민영일 이사는 “럭비는 다른 어떤 경기보다 협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스포츠”라며 “그래서 럭비를 ‘All for one, One for all(전체는 한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은 전체를 위해) 게임’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했다. 희생과 인내, 협력의 중요성을 배운다는 것이다. 럭비가 영연방 국가의 명문학교 교육과정에서 빠지지 않는 이유다.

○노 사이드(No Side)

옆자리의 중년 남성은 수시로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응, 난데, 비겼어. 22 대 22로. 아마 연장전을 할 모양이야. 점수 나면 또 전화할게.”

고준성(56·무역업) 씨는 11일 서울 구로구 오류동 럭비구장에서 열심히 경기 상황을 중계했다. 그는 럭비 마니아다.

고 씨는 “아내가 급한 일이 있어 경기장에 못 왔는데 득점이 나면 바로 알려줘야 한다”고 했다. “안 그러면 궁금해서 못 견딜 것”이란다. 12년 전 아들이 럭비를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 고 씨 부부는 볼만한 럭비 경기가 있으면 제주도까지 원정관람도 마다하지 않는다.

럭비는 1823년 영국 럭비 시(市)의 한 학교에서 탄생했다. 축구를 하던 한 학생이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공을 안은 채 상대 골문으로 뛰어들면서 ‘새로운 풋볼’이 탄생했다.

손과 발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럭비는 인간 본성에 충실한 스포츠다. 선수들은 80분 내내 공을 차지하기 위해 뛰고 쓰러지고 밀어내며 혼신의 힘을 다한다.

모든 것을 쏟아 붓기 때문일까. 경기에서 지면 우는 선수가 유달리 많다. 이날 전국체전 경기도 대표를 가리는 결승전에서는 연장전 끝에 22 대 28로 진 대심통상 팀이 경희대 팀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럭비인들은 정직하고 신사다운 럭비의 규칙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럭비는 미식축구와 달리 앞으로 건네는 패스가 없다. 공을 가진 사람이 직접 뛴 성과만 인정한다. 상대를 속이는 ‘모션’엔 어김없이 반칙 휘슬이 울린다. 움직일 방향을 상대에게 알리고 공격하라는 의미다. 옆줄 밖에서 공을 경기장 안으로 던질 때는 상대편과 자기편의 가운데로 보내야 한다.

경희대 럭비부 안덕균 감독은 “거짓이 통하지 않는 세계다. 정직과 그에 따른 실행만이 성과를 낸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럭비의 정신은 살아 있다. 정통 럭비구장에는 샤워장이 단 1곳. 흥분된 상태에서 맞섰던 상대를 벌거벗고 만나야 한다. 샤워 후 그들은 정장 차림으로 함께 식사하고 우정을 나눈다. 경기 종료를 ‘노 사이드(No Side)’라고 부르며 ‘네 편’ ‘내 편’을 가리지 않는 것이 럭비 정신이다.

럭비의 불문율 하나. 럭비는 천재지변과 전쟁이 아닌 한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시작한다. 폭우와 폭설, 짙은 안개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럭비는 인생이다

럭비는 15명이 하는 게임이다. 공을 상대편 골라인 너머까지 가져가 땅에다 찍거나 ‘H’자 골대의 위쪽 공간으로 차 넣으면 점수를 얻는다.

럭비는 거친 스포츠다. 그러나 ‘터치 럭비’나 ‘태그(꼬리표) 럭비’를 하면 부상의 공포에서 벗어나 럭비의 재미를 두루 즐길 수도 있다.

터치 럭비에서는 양손을 상대 선수 몸에 갖다 대면 태클을 한 것으로 간주한다. 태그 럭비에서는 미리 몸에 붙이고 있던 꼬리표를 떼면 태클을 한 것으로 본다.

최근 국내에서도 럭비의 맛을 아는 사람이 조금씩 늘고 있다. 인터넷 동호인 모임에서 출발해 정식 럭비팀으로 발전한 ‘하카’는 뒤늦게 럭비의 매력에 빠진 20, 30대 남성이 주축이다. 소성호 회장은 “외국에서 럭비 문화를 접한 회원들이 럭비를 잊지 못해 모인 것”이라며 “스킨십이 많은 스포츠라 팀원들의 소속감과 일체감이 강하다”고 소개했다.

럭비인 특유의 동료의식 때문일까. 국내에서 럭비를 즐기는 외국인들은 한국 럭비를 향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

벅스 부사장은 ‘한강 해적’ 팀을 만들면서 창단 취지문에 ‘한국 럭비 인구의 저변 확대에 기여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그들은 한국의 럭비 여건이 아직 열악하지만 아시아에서 일본과 겨룰 유일한 나라는 한국뿐이라며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자신의 삶이 나약하고 무료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몸과 몸, 투지와 투지가 맞부딪치는 럭비에 빠져 보자.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글=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사진=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국내 럭비팀 61개… 1920년대에 ‘수입’

한국에서 럭비는 아직도 낯설고 이국적인 스포츠다. 때로는 미식축구와도 구분이 안 된다.

그런 럭비지만 전용경기장은 축구보다 먼저 갖췄다. 서울 구로구 오류동 온수 지하철역에서 100여 m 떨어진 서울럭비구장은 1973년 문을 열었다. 럭비협회 회장이었던 주창균(85) 옛 일신제강 회장이 당시 사재 10억여 원을 들여 만들었다. 축구 전용경기장은 그로부터 17년 뒤인 1990년 포스코에 들어선 구장이 처음이다.

그러나 서울럭비구장의 규모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구장 내 경기장은 당초 4곳이었지만 지금은 잔디가 깔린 주경기장 1곳만 남았다. 구장 소유주인 현송문화재단은 정부나 민간 후원이 거의 없어 이마저도 버티기 힘들어한다.

럭비구장의 국제 규격은 ‘길이 100m 이내, 폭 70m 이내’로 축구경기장 국제규격(길이 100∼110m, 폭 64∼70m)과 비슷하다.

럭비는 1920년대 일본인에 의해 처음 한국에 소개됐다. 초기엔 조선총독부, 경성사범학교, 철도청 등을 중심으로 경기를 치렀다. 1929년 2월 조선럭비축구협회가 발족하면서 보성전문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 배재고등보통학교 등에 럭비부가 생겼다. 6·25전쟁 이후에는 군의 전력 증강을 위해 육·해·공군 사관학교 등에서 럭비를 시작했다.

올해 7월 현재 협회에 등록된 럭비팀은 61곳으로 2001년에 비해 4곳이 줄었다. 일본에는 4000개 팀, 12만 명의 선수가 활동 중이다.

한국은 1982년 8회 아시아선수권대회 등에서 우승하며 아시아 럭비 강국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1987년부터 4년마다 열리는 럭비 월드컵에는 일본이 매번 아시아 대표로 진출한다. 2007년 프랑스 럭비월드컵의 아시아 최종예선전은 11월 스리랑카에서 열린다. 럭비 경기의 자세한 규칙과 경기일정 등은 대한럭비협회 홈페이지(rugby.sports.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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