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너진 사회… 正直으로 다시 세워야

  • 입력 2005년 12월 26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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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 세계에 고개를 들 수 없이 부끄러운….”

천주교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16일 평화신문 평화방송과 가진 성탄 인터뷰에서 황우석(黃禹錫) 서울대 석좌교수 사건으로 국민이 입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지에 대해 답하다가 한동안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23일 서울대 조사위원회가 황 교수의 2005년 사이언스 게재 논문에 대해 “진실성이 중요한 과학의 기반을 훼손한 중대한 행위”라고 조작 사실을 인정한 후 대부분의 국민은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국가정보원에 의한 대규모 도청, 재벌기업과 언론사 총수가 얽힌 ‘X파일’의 존재 등이 밝혀지면서 우리 사회의 신뢰가 무너졌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의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전 세계에 한국 사회의 하드웨어 부실을 드러냈다면, 도청이나 황 교수 사건은 우리 사회의 소프트웨어(정직, 신뢰)의 붕괴를 보여 준 더 심각한 사안이라고 지적한다. 그런 만큼 이번 황 교수 사건을 우리 사회의 ‘정직성’과 ‘신뢰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총체적인 사회구조적 문제

황 교수 사건에 대해 전문가들은 학계뿐 아니라 이런 일이 가능했던 총체적인 사회구조적 문제를 치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빨리빨리’ 문화, 결과 지상주의, 감상적 애국주의 등에 휩쓸려 정부 학계 언론이 모두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결과로 지적되고 있다.

윤평중(尹平重·철학) 한신대 교수는 “황 교수에 대한 국민적 실망이 더욱 커진 것은 그가 과학자가 아닌 악성 정치인에게서 볼 수 있는 거짓말, 말 바꾸기, 책임 떠넘기기, 시간 벌기 등을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앞으로 공인(公人)들의 언행을 단호히 검증하고, 심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

황 교수 사건은 달라진 정보환경에서 더는 조작이나 눈속임이 통할 수 없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김일섭(金一燮) 다산회계법인 대표는 “정보 소통의 폭과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상황에서 학계든 기업이든 정직과 신뢰가 기반이 된 ‘윤리경영’은 생존의 필수조건이 됐다”며 “예전에는 통하던 관행이었는데 왜 갑자기 지금은 안 되느냐고 억울해하는 것은 환경이 변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험실에 국한되지 않아

황 교수 연구팀의 김선종 연구원은 논문 조작 지시에 왜 저항하지 못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힘이 없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자기통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 주는 증언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조직 내 건전한 비판이나 부당한 지시에 대한 항거는 의로운 행위보다는 배신, 변절로 따돌림당하는 문화도 사건을 키운 원인으로 지적된다.

이러한 내부 자정시스템의 결여는 단지 실험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사태의 진행 과정에서 정부, 학계, 언론계 등도 자정과 검증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평가다.

조성택(趙性澤·철학) 고려대 교수는 “논문 조사 결과가 조작으로 나와도 심정적으로는 믿고 싶어 하는 ‘황우석 신드롬’은 최근 한국 사회의 독특한 다이내믹을 보여 주는 것”이라며 “정보기술(IT)산업 이후에 생명공학(BT)산업이 한국을 먹여 살릴 것이라는 기대 아래 모든 문제를 ‘국익 차원’에서 접근하는 국가주의적인 분위기가 차분한 논의와 비판을 막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경(李載景·언론학) 이화여대 교수는 “언론은 특정 취재원이 마음대로 어젠다를 세팅하는 발언을 할 때마다 진실성 여부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만 하거나, 과학 보도인데도 불구하고 정파적 편 가르기 성향을 보였다”며 “이로써 국민 신뢰 작동 메커니즘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혼란을 가중시킨 책임이 크다”고 분석했다.

○전화위복 계기로 삼아야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이후 건설업체들의 설계와 감리기준은 엄격해졌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은 회계를 글로벌스탠더드에 맞추려고 노력해 왔다.

김일섭 대표는 “선진국들도 모두 수백 년간 아픈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윤리를 세우고 발전시켜 왔다”며 “이번 황 교수 사태를 학문 분야뿐 아니라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의 정직성과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새로운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이번 사태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직하고 정직하게 살자. 이것이 바로 치유책이고 수습책이다”라고 진단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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