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매체 시대 조용한 반란 ‘낭독’…TV-라디오 프로그램 인기

  • 입력 2005년 12월 7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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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고 현란한 영상의 시대에 느리지만 삶을 반추하는 낭독 프로그램이 주목을 받고 있다. KBS 1TV ‘낭독의 발견’에 출연한 가수 인순이, 안치환, 시인 장석주 씨(왼쪽부터). 사진 제공 KBS
빠르고 현란한 영상의 시대에 느리지만 삶을 반추하는 낭독 프로그램이 주목을 받고 있다. KBS 1TV ‘낭독의 발견’에 출연한 가수 인순이, 안치환, 시인 장석주 씨(왼쪽부터). 사진 제공 KBS
KBS1 TV ‘낭독의 발견’(매주 수요일 밤 11시 35분)이 한 달 뒤인 내년 1월 11일 100회를 맞는다. 올해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됐던 고은 시인이 출연해 시를 낭송하고, 초청된 시청자 300명에게 와인을 대접하며 낭독의 즐거움을 나눈다는 게 100회 특집 계획이다. 첫 방송은 2003년 11월 5일. “이렇게 오래 방영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제작진은 말한다.

소리 내 읽는 단순한 행위가 다매체 시대인 21세기에 조용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라디오방송인 교통방송은 5월부터 ‘책 읽는 서울’(매주 토, 일요일 오전 8시)을 방송하고 있다. 황원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에는 시와 소설을 원문 그대로 낭독하는 코너가 있다. 위성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오디오 채널 ‘북채널’에서도 4월부터 다양한 책을 낭독으로 들려주고 있다. 청취자들은 ‘편안하다’ ‘차분한데 감동적이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숙명여대 강미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아날로그적 형식인 낭독이 디지털시대 TV에 선보이면서 시청자들이 뜻밖의 신선한 충격을 경험하는 것 같다”면서 “그동안 영상에 몰입했던 현대인에게 잊고 있었던 청각을 환기하게 한다는 점에서 낭독의 힘이 21세기에 재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몸으로(입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 메시지를 스스로 받는다는 점에서, 낭독은 ‘몸이 미디어’라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많은 낭독자는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을 때 감정이 솟아나고 증폭된다고 털어놓는다. 관객도 낭독자가 느끼는 감정의 흐름에 동참한다. 평론가 김동식 씨는 “근대 이전에는 소리를 내서 읽는 낭독이 일반적인 독서 관행이었다”면서 “몸이 인간의 사상을 전달하는 ‘채널’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올해 교보문고에서는 성석제 은희경 한강 씨 등 작가들의 낭독회가 잇따라 열렸다. 교보문고 측은 “사인회보다 낭독회를 선호하는 작가가 늘어나고 독자들의 반응도 좋아 내년에는 낭독회를 정기적으로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문화재단도 올해 내내 독서 낭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한 달에 한 번 시민들과 만나 전문 아나운서 등이 시와 소설을 읽어 주는 행사였다.

‘낭독의 발견’의 홍경수 PD는 “낭독이라는 행위에는 성찰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무대에 선 낭독자들이 글을 소리 내 읽으면서 과거의 경험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7월 출연했던 가수 인순이는 가요 ‘거위의 꿈’의 노랫말인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라는 부분을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 혼혈로 살면서 겪은 그간의 마음의 상처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인순이는 그때를 돌아보면서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가 갑작스럽게 크게 다가와 가슴을 쳤다.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고 말했다.

낭독 프로그램의 새삼스러운 인기에도 불구하고 TV와 라디오에서 활성화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저작권 때문이다. 작품을 방송에 내보낼 때마다 프로그램 제작진은 작가들에게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작품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며 작가들이 사용료를 안 받는 경우도 많지만, 사용에 앞서 낭독하는 작품마다 작가의 동의를 구하는 것은 필수다. 이런 절차의 번거로움을 간소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낭독 프로그램이 더욱 활발해질 수 있다고 방송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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