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애욕 혹은 불만…발에 관한 보고서

  • 입력 2005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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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足)로 말하는 영화가 있다. 잠깐 스쳐가는 주인공의 발 이미지에 비밀스러운 메시지나 정서를 심어 놓은 경우가 그것이다. 여배우의 발은 때론 가슴이나 성기보다 훨씬 강렬한 성(性) 상징이다. 때론 주체할 수 없는 공허함의 표상이기도 하다. 최근 기자가 본 수백 편의 국내외 영화 중에서 ‘말하고 있는 발’을 순간 포착했다.》

① ‘사랑니’=애욕의 발

“나 걔랑 자고 싶어.” 동거남에게 ‘쿨’하게 털어놓는 인영(김정은). 열세 살 연하 고교생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 그녀가 보여주는 발등은 마른 장작처럼 삐쩍 말랐지만 언제라도 활활 타오를 것 같은 일촉즉발의 흥미진진함이 묻어난다. 셋째가 넷째보다 짧은 김정은의 발가락은 정중동(靜中動)의 맛이 있다.

②‘분홍신’=불만의 발

하이힐에 발을 집어넣는 선재(김혜수). 그녀의 발끝에선 남편에 대한 성적 욕구불만과 더불어, 억압된 자아로부터 탈출하고픈 일탈 욕구가 읽힌다. 그녀의 몸 이미지처럼 ‘도톰’한 김혜수의 발은 뾰족하게 모을 때 동물적인 섹슈얼 판타지를 자극한다.

③‘너는 내 운명’=신뢰의 발

농촌 총각 석중(황정민)과 다방 종업원 은하(전도연)는 커다란 고무 대야에서 거품 목욕을 하며 사랑을 확인한다. 석중의 얼굴에 뻗은 은하의 발은 무한 신뢰의 다른 표현. 전도연의 발은 매끈한 편은 아니지만 풍부한 ‘끼’와 기름진 표정이 넘친다.

④‘토니 타키타니’=상실의 발

쇼핑 중독인 에이코(미야자와 리에)가 뒤꿈치를 살짝 들었다. 텅 빈 존재감을 채우기 위해 미친 듯이 옷을 사들이는 그녀는 쇼핑하러 타고 나갈 자동차를 세차하는 중이다. 들뜬 듯하면서도 상실감이 짙게 드리운 까치발. 미야자와 리에의 유아적 뒤꿈치는 각종 스캔들의 진원지인 그녀의 끈적한 이미지를 기묘하게 배신한다.

⑤‘2046’=소통의 발

콜걸 바이링(장쯔이)은 옆방에 사는 외로운 작가 차우(량차오웨이)의 가슴팍에 유혹적으로 발을 문지르며 마음의 소통을 청한다. 그러나 차우의 마음은 열리지 않고…. 현대인의 소통 부재를 슬프게 증언하는 대목. 장쯔이의 발은 뒤꿈치가 필요 이상 발달해 날렵하고 도발적인 그녀의 이미지를 갉아먹는다.

⑥‘달콤한 인생’=운명의 발

보스의 여자를 찾아간 선우(이병헌)는 하이힐을 신는 그녀(신민아)의 모습을 힐끗 쳐다본다. 이 순간의 느낌에서, 인생을 건 선우의 무모한 도박은 잉태된다. ‘장화, 홍련’에 이어 김지운 감독은 풋 페티시즘(Foot Fetishism·발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행위)을 숨기지 않는다. 신민아의 발은 말쑥하지만 상상력이 부족한 느낌.

⑦‘몽상가들’=해방의 발

몸의 자유와 혁명정신을 주장하는 이사벨(에바 그린). 그녀의 발에 현실과 이성의 힘을 강조하는 매튜(마이클 피트)가 얼굴을 비벼댄다. 에바 그린의 발그레한 발가락에선 ‘인간 본연(Human Nature)’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이 분출된다. 발가락도 어쩜 그녀의 눈빛처럼 청초하면서도 마디마디 철이 없는지….

⑧‘여자, 정혜’=단절의 발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정혜(김지수). 구두가게에서조차 그녀의 발은 세상을 향해 닫혀 있다. 김지수의 엄지발가락은 새침하고 신경질적이면서도 어찌 보면 무방비 상태인 것 같은 이율배반성이 더욱 매혹적.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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