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백 년의 그늘 - 유재영

  • 입력 2005년 10월 2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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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 마리가 똥을 누네 느릅나무 가지 사이로 반짝, 빛나는 지상의 얼룩. 조금 전 밀잠자리 사냥으로 배가 부른 채 어슬렁 어슬렁 산책을 즐기시던 버마재비가 순간 놀라 속옷까지 다 보이며 날아가네 며칠 전 알에서 깨어난 금빛어리표범나비 날갯짓 한참 하고 가더니 오랫동안 입 다물고 있던 금강초롱이 비로소 꽃이 되었다 보는 이 없어도 그냥 이루어지는 저 아름다운 기교여 소풍 나온 어린 바람 저희끼리 치고받으며 히히대고 어느덧 개망초꽃 너머 한결 팽팽해진 햇빛들, 느릅나무는 오늘도 그냥 그 자리 백 년도 더 된 커다란 그늘을 평평하게 깔고 있었다

- 시집 ‘고욤꽃 떨어지는 소리’(시학) 중에서

백 년 그늘 아래 일어난 일들 참 흥미진진하네요. 어쩌면 저리도 시끌벅적한 고요가 다 있을까. 새 똥 누는 소리, 버마재비 속옷바람으로 날아가는 소리, 금강초롱 꽃 피는 소리, 어린 바람 히히 대는 소리 다 합쳐도 술 취한 사람 잠꼬대하는 소리만도 못하겠어요. 아 물론 그 밖에도 자벌레 아삭아삭 풀잎 갉아먹는 소리, 민달팽이 배 끄는 소리, 망초꽃 흰눈썹 빠지는 소리는 치지도 않았지요. 보는 이 없어도 그냥 이루어지는 기교라 하셨나요. 외롭기로야 평생 벌, 나비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 충매화도 있는걸요. 아무도 보지 않아도 제가 저를 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지요. 저마다 외로워도 숲이지요.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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