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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9월 15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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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의 시인 류기봉(40) 씨 포도밭에는 방수막을 씌워 놓은 스피커들이 있다. 새순이 올라오는 4월, 포도 꽃이 피는 5월, 그리고 그가 일하는 때때로 포도나무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다.
1998년부터 매년 ‘포도밭 작은 예술제’를 이곳에서 열어 온 류 씨. 어느 결엔가 ‘포도밭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가 최근 ‘포도 눈물’(호미)이라는 시선집을 펴냈다. 포도와 관련된 27편의 시를 모았다.
문학적 기교나 현란한 수사가 없는 그의 시는 농부의 영농일기처럼 편안하게 읽힌다. 하지만 ‘포도 눈물’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땅에서 농사짓는 일의 힘듦과 애달픔이 곳곳에 보인다. 한국과 칠레 간에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된 뒤 더욱 힘겨워진 농사일, 포도 값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물가 같은 ‘현실’이 담겨 있다. 류 시인은 포도나무와 함께 이 힘든 현실을 헤쳐 간다. 그는 ‘껍데기 예수’라는 시에서 ‘우리 밭 나무들이 진짜 예수다/예수는 포도밭에서 매일 부활한다/여의도에는 괴롭게 매어 달린 우상 예수/철사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나의 포도나무는 살아있는 예수’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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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문재 씨는 “류기봉은 유기농과 어감이 참 비슷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류 씨는 유기농을 하고 있으며 시들에도 그 이야기들이 나타난다. ‘한약가공공장에서 부스러기로 나온/한약 가루를 나무에 뿌렸습니다/소뼈, 돼지뼈, 달걀 껍데기 가루를 뿌렸습니다./약간의 화학비료도 주고 싶어 하시는/아버지의 눈치는 모른 척하였습니다.’
그는 포도나무가 벌레들의 공격을 받고도 견딜 수 있도록 쓰고 남은 약재를 주지만, 화학비료를 주고 싶은 아버지와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는다. 그는 방가지똥 같은 독초를 발효시켜 살충제로 쓰는가 하면, 바닷물을 싣고 와 밭에 뿌려주기도 한다. 그는 ‘포도의 아이’에서는 이렇게 썼다. ‘포도나무는 또 내 애인의 몸이고/내 뒤통수이다/…/그 여자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아이가 내 아이라는 걸/나는 알고 있다./이제 노란 화관이 터져/아이들이 걸어 나오고 있다./햇빛 좋은 유월 초순이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제주도 내려가 장편 ‘호랑이는 왜…’쓴 소설가 윤대녕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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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윤대녕(44) 씨가 2003년 4월 제주로 가 2년 동안 머물며 쓴 장편소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생각의나무)를 최근 펴냈다. 그는 원래 살던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로 올해 4월 다시 이사 왔지만 이 소설은 ‘제주도 소설가 윤대녕’이 펴낸 것이라 할 만하다. 제주에 있을 때 썼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그가 찾아다녔던 제주 곳곳이 선명한 이미지 속에 재현되기 때문이다.
제주공항에서 20분 거리에 있다는 삼양해수욕장 앞바다의 풍경은 이렇다.
‘무엇일까. 거대한 은빛의 무리가 찬란하게 수면 위로 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커다란 빗자루로 햇빛을 이리저리 쓸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멸치 떼였다. 일군의 멸치 떼가 히데코가 딛고 서 있는 미역 밭 가까이로 하얗게 몰려들어 와 있었다.’
윤 씨는 “제주에서 2년 살았는데, 1년은 소설을 쓰고 1년은 낚시를 했다”고 말했다. 파도의 움직임과 풍향, 물고기와 물고기 떼의 묘사, 입질의 풍경, 미끼를 문 물고기와의 힘 싸움과 물고기의 맛, 조난 같은 ‘낚시꾼 이야기’가 가득하다.
‘한 가닥의 가느다란 줄에 바늘을 묶고 찌를 달아 수면에 던지면 잠시 후 바다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마침내 고기가 발밑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 이어 입질을 받았을 때 낚싯대를 타고 손으로 전해져 오는 물고기의 종류와 씨알.’ ‘대형 긴 꼬리 벵에돔을 잡아 올렸다. 고기가 잡아끄는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낚싯줄이 마치 전깃줄처럼 윙윙거렸다.’
이렇게 낚시에 몰두하는 소설 속의 인물은 직장을 잃고, 제주에 내려와 있는 소설가 영빈이다. 시대 고(苦)와 삶에 지친 386세대인 그는 컴퓨터 뒤편이나 핵발전소 같은 데서 헛것 같은 호랑이를 보다가 제주로 내려온다. 그와 이웃해 살던 애인인 해연도 그를 찾아 제주로 온다.
윤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주로 내려가기 전에 이 소설 도입부만 써놓았는데 잘 진척이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주에 가 있는 동안 뭔가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북제주 바다가 내다보이는 곳에 살았는데 바다 자체가 생명의 덩어리라는 걸 알 것 같았습니다. 파도치는 자연의 리듬과 시간의 반복이 글 쓸 힘을 주더군요.”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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