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 입력 2005년 6월 11일 03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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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김태수 지음/391쪽·1만7000원·황소자리

‘포켓트에 너흘 수 잇는 호화로운 식탁이다.’

1928년 동아일보에 실린 초콜릿 광고. ‘3500카로리라고 하는 경이적인 열량을 함유하야 체내에서 에네루기가 된다’고 밝히고 있다. 간식 하나에도 ‘영양’을 강조해 능률과 합리의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지만, ‘고열량’이 자랑거리가 된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온다.

부제 ‘신문광고로 본 근대의 풍경’이 나타내듯 저자는 일제강점기의 신문광고를 통해 ‘침략과 새로운 문명 속에 휘청댔지만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풍경을 하나하나 수놓는다. ‘근대화가 조선에 해악만 끼쳤다는 피해망상도, 일본이 아니었으면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자포자기도 배제하고 지나간 시대의 장면과 양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겠다는 의도다.

먹고 사는 것이 절실했던 시대, 포도주조차도 한가로운 기호품으로 그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칼슘 철 등 귀중한 영양계를 가지고 있어 식욕부진 허약 등 인(人)에게는 참으로 절호한 음료’로 선전되었다. 먹는 문제를 넘어서니 위생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세발제(洗髮劑) 광고는 ‘일주 일차(一週 一次) 머리감기를 잊지 마시고…’라고 강조한다.

갑남을녀(甲男乙女)야 일주일에 한 번 머리를 감았지만 이미 도회의 가로에는 ‘모단 뽀이’ 들의 댄디즘이 물결치고 있었다. 구두 광고는 ‘부럽도다 시원한 청풍 부는 곳에 산뜻한 양화(洋靴) 신고 활발히 걸어가는 저 청년의 보조’를 예찬하고 있다. 너도 나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살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신분 상승을 가능케 하는 방도는 무엇이었을까.

‘입신출세를 꿈꾸는 청소년 제군에게 잇서서는 영어는 제일 중요한 자본’이었으나 교사는 적고 학생은 많았다. ‘교사의 월급(수강비)은 다 선급이요 다만 며칠만 배워드려도 월급은 한달 세음(셈)으로 할 터이니 그리들 아시오’라는 배짱에 이르면 ‘수강생의 권리’는 온데간데없다.

휴일에는 영화관에서 ‘예술 지상주의의 작가 6부린(채플린) 씨가 실로 수년간 고심 결정해 짜낸’ 영화를 감상할 수도 있고, ‘우리의 청각신경을 만족케 하는 진육성(眞肉聲)을 발휘하는 라디오 수신기’를 벗삼아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게 되었지만 진짜 별천지는 엉뚱한 데 생겨났다. ‘절세의 미인이 몸에 일사(一紗)도 부(附)치 아니한 나체 사진이외다. 밤의 쾌락을 맛볼라는 남녀에게 권합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과감한 광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6년 백림(베를린)에서 날아온 조선 남아 손기정의 승전보는 ‘건강한 조선을 목표하고 다같이 위장을 건전케 하기 위하야 누구나 위장양제 활명수를 복용합시다’라는 자신감을 안겨 주지만, 세계를 불태울 화마가 어느새 턱밑에 다가와 있었다. ‘적군의 응징은 폭탄으로 하지만은 설사 복통의 폭격은 헤루푸로’하자는 반(半)격문성 약 광고를 마지막으로 한글 광고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저자는 광고 문안에서 때로는 명백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읽히는 시대의 기류에 신문 잡지 기사, 총독부 포고문, 사진 등 다양한 자료를 엮어 한층 풍성하게 펼쳐냈다. 작가 김훈은 “그의 글은 사소한 것들의 무게를 입증한다. 여기서 잡동사니는 허섭스레기가 아니고 사소한 것은 가볍지 않다. 읽어야 할 것은 이처럼 일상 속에 있었다”고 이 책의 미덕을 추어올린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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