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입력 2005년 3월 25일 16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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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연의 ‘미술관 접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술관 사진을 찍어 가위로 오려낸 뒤 종이처럼 접어버린 작품으로 ‘종이접기(오리가미)’라는 놀이를 통해 미술관의 권력화를 야유하고 있다. 사진 제공 휴머니스트
최소연의 ‘미술관 접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술관 사진을 찍어 가위로 오려낸 뒤 종이처럼 접어버린 작품으로 ‘종이접기(오리가미)’라는 놀이를 통해 미술관의 권력화를 야유하고 있다. 사진 제공 휴머니스트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진중권 지음/376쪽·1만5000원·휴머니스트

미학자 진중권은 인간의 미래가 공산주의가 될 것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예언은 틀렸지만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라는 예언은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미래의 윤리학도 미학이 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이 실현돼가고 있다고 말한다.

최소한 그 자신에게는 이 말이 맞다. 저술행위를 생계로 삼겠다고 선언했던 그 자신에게 글쓰기는 불면과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즐거운 유희다. 지난해 6월 15일부터 10월 15일까지 4개월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진중권이 본 서양미학의 세계-놀이와 예술’을 토대로 쓴 이 책은 그런 유희의 극치다.

우선 주제가 놀이와 게임이다. 주사위, 체스, 숨바꼭질, 그림자놀이, 불꽃놀이, 미로놀이, 인형놀이, 수수께끼, 마술, 만화경 등 20가지 놀이가 여러 예술작품들 속에서 어떻게 구현됐는지를 소개한다. 모차르트는 주사위 2개를 던져서 나온 결과로 작곡하는 실험을 했고, 초현실주의 화가 마르셀 뒤샹은 붓을 던진 뒤 체스로 소일했다. 렘브란트, 카라바조, 벨라스케스 같은 유명 화가들이 광학기구를 이용해 실제 풍경을 캔버스에 비친 뒤 이를 베꼈다는 스캔들도 등장한다.

둘째, 이 책은 책이라는 미디어를 하나의 장난감으로 만들었다. 이 책에는 장난기 가득한 그림과 사진이 수백 장 들어 있다. 독자들은 그 속에 숨은 이미지와 의미를 찾기 위해 책을 거꾸로 봐야할 때도 있고, 수직이나 대각선으로 돌려 봐야할 때도 있다. 다겔릭스 게오펜드라는 화가의 ‘파노라마 암스테르담’이라는 작품을 감상하려면 책을 수직으로 또 옆으로 돌려 봐야 한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물체의 실체(해골)를 확인하려면 대각선으로 올려다 봐야 한다.

셋째, 이 책에는 일종의 퍼즐 풀이가 가득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리버스’(수수께끼 그림)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에서 라틴어 텍스트를 읽어내야 한다. 반대로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의 ‘성스러운 십자가의 봉인’이라는 십자가 찬가는 그 텍스트의 철자들을 세로로 읽거나 대각선으로 읽어도 의미가 통하도록 한 아크로스틱을 이용해 라틴 십자가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전통적 책 읽기 방식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는 ‘장난’을 치고 있다. 보통 책은 앞에서 뒤로 차근차근 읽어 가야 하는 선형적 구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앞에서 본 구절, 문장, 인용이 뒤에서도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체스를 두는 자동인형이 ‘체스’ 장과 ‘자동인형’의 장에 동시에 등장하고, 프랑수아 니세롱이 그린 루이 13세의 왜상(歪像)이 ‘아나몰포시스(왜상)’과 ‘애너그램(철자 바꾸기)’에 함께 나오는 식이다. 저자는 이런 교차점을 통해 독자가 아무 장이나 골라서 읽더라도 다른 장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십자말놀이를 펼친다.

이처럼 장난기 가득한 이 책의 메시지는 결국 ‘악동들이여 축복 있으라’로 요약할 수 있다. 저자는 “공상과학(SF)은 더 이상 문학의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아예 현실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그 힘은 ‘호기심에 한계가 없고, 상상력에 구속이 없는’ 어린이의 마음, 삶 자체를 하나의 놀이로 즐길 수 있는 그런 마음에서 길러진다는 것이다. 저자에게 ‘애들은 가라’는 말처럼 시대착오적 표현도 없을 것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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