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커밀라 ‘부적절한 35년 로맨스’…사랑은 위대했다?

  • 입력 2005년 2월 17일 15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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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간에 걸친 사랑의 결실인가, 아니면 결국 승자가 모든 걸 갖는 게임이 끝났을 뿐인가.

영국 찰스 왕세자(56)가 오래된 연인 커밀라 파커볼스 씨(57)와 4월 8일 결혼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불륜과 추문,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의 비극적 죽음 등으로 얼룩져 온 이들의 질긴 로맨스도 ‘해피 엔딩’을 맞게 됐다.

다이애나가 영국 국민의 공주, 불운한 사람들의 여신으로 자리 잡는 동안 커밀라에게 부여된 이미지는 마녀, 가정파괴범이었다. 그러나 찰스와 커밀라의 재혼이 발표된 뒤, 승자를 미화하기라도 하듯 커밀라에 대한 긍정적 보도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랑이라 해도 그 오랜 세월의 치욕을 견뎌낸 커밀라는 누구인가. 그건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다이애나가 생전에 커밀라를 ‘로트바일러 개’라고 불렀듯 사냥감을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집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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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모던 로맨스

찰스와 커밀라의 재혼을 찬성하지만 탐탁지 않은 분위기가 여전한 영국과 달리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찰스와 커밀라의 재혼을 ‘위대한 포스트모던 로맨스’로 바라본다.

미국과 영국 양쪽 모두에서 베이비 부머들이 노년에 접근해 가는 시기이고, 노년에도 로맨스를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요즘 시의적절한 로맨스라는 것. 미국 뉴욕타임스는 “다이애나가 조건 없이 사랑 받기를 갈구하는 여성들을 대변했다면 커밀라의 결혼은 운명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불렀다.

찰스가 다이애나에겐 몹쓸 사람이었지만 트로피처럼 전시할 만한 젊고 예쁜 여성 대신 늙고 매력적이지 않은 커밀라를 선택한 것, 얄팍한 관계가 늘어나는 세상에서 찰스와 커밀라의 영속적인 관계는 그 또래의 중년 여성들에게 달콤한 판타지를 선사한다.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의 아내였으며 이혼한 뒤 대학시절의 연인과 재혼한 방송인 도나 하노버 씨는 “찰스와 커밀라가 비판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지속해 온 것은 젊은 시절에 강하게 이끌린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로맨스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미국 소설가 노라 로버츠 씨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이기적인 행동은 사랑이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줬는가”라고 회의적으로 반문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커밀라를 마녀처럼 묘사해 온 매체들이 태도를 바꿔 그의 친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평균적인 영국 여성들은 다이애나보다 커밀라와 훨씬 더 공통점이 많을 것” “커밀라는 다이애나보다 덜 복잡한 성격에 아웃도어 스포츠, 유머를 즐기는 취향을 찰스와 공유하는 사람” “그녀는 여왕에 대한 야심이 없으며 다만 사람들이 자신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는 이야기들을 전하느라 바쁘다.

○ 불륜의 내력

재혼이 발표된 뒤 커밀라와 찰스 집안의 불륜의 내력도 흘러나왔다. 영국의 신문, 방송들은 커밀라의 증조모인 앨리스 케펠이 찰스의 고조부인 에드워드 7세의 마지막 정부(情婦)였다는 사실을 전했다. 29세의 유부녀였던 앨리스는 57세의 유부남인 에드워드 7세를 만나 에드워드 7세가 죽을 때까지 관계를 지속했다.

커밀라도 이러한 집안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1970년 커밀라와 찰스가 처음 만났을 때 커밀라는 찰스에게 “내 증조모와 네 고조부가 연인이었어. 어떻게 생각해?”하고 말을 걸었다는 것.

수줍음이 많은 찰스와 대조적으로 활발한 커밀라는 곧 사랑에 빠졌지만 우유부단한 찰스가 해군에 입대한 뒤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이들의 관계는 유지됐다. 찰스에게 다이애나와 결혼하라고 권고한 것도 커밀라이고 찰스가 다이애나에게 청혼한 곳도 커밀라의 정원이라고 전해진다.

소문만 무성할 뿐 은밀한 정부였던 커밀라는 1992년 찰스와의 농밀한 전화통화를 녹음한 테이프가 공개된 ‘커밀라 게이트’ 이후 슈퍼마켓에서 사람들에게 빵 세례를 받는 모욕을 당했고 1995년에 TV에 출연한 다이애나가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뒤 ‘공공의 적’이 된다.

불륜이 드러나면서 겪은 수모만 본다면 커밀라보다 그의 증조모 앨리스가 더 행복했다. 앨리스의 시절엔 불륜이 흉도 아닌 데다 에드워드 7세는 여섯 명의 자녀를 낳은 아내인 알렉산드라 여왕을 두고도 공식 행사에는 앨리스와 동행했다.

하지만 로맨스의 결말은 커밀라가 한 수 위다. 커밀라는 ‘해피 엔딩’을 얻었지만, 증조모 앨리스는 12년간 ‘왕의 여자’로 막강한 파워를 누리고도 1910년 에드워드 7세가 죽은 뒤 조위장에 서명하는 권리조차 갖지 못했다.

○ 프린세스 오브 콘소트 (Princess of Consort)

커밀라는 영국 왕실 역사상 왕위 계승자와 정식으로 결혼하는 첫 이혼녀이며 찰스가 왕이 되면, 전통적으로 여왕으로 불리던 왕의 아내들 가운데 첫 번째 예외가 된다.

결혼 후 커밀라가 갖게 될 존칭은 왕세자비 대신 ‘콘월 공작부인’. 찰스가 왕이 되어도 여왕이라는 칭호 대신 격이 하나 낮은 ‘프린세스 오브 콘소트(왕의 배우자)’로 불리게 된다. 19세기에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이 ‘프린스 오브 콘소트’로 불린 적은 있으나 영국 왕실 역사에서 ‘프린세스 오브 콘소트’는 처음이다. 이는 커밀라를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타이틀. 이혼녀라는 전력 때문이다.

영국 교회는 1534년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을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로 교황청과 결별해 출범했는데도 줄곧 왕실의 이혼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1936년에 에드워드 8세는 두 번 이혼한 전력이 있는 미국 출신인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려 했으나 교회가 반대하자 왕위를 버렸다. 반면 1955년 찰스의 고모인 마거릿 공주는 왕족의 지위와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 대신 사귀던 이혼남과 결별해야 했다.

이젠 세상이 바뀌어 엘리자베스 여왕이 찰스와 커밀라의 결혼을 허락하고 축복했지만 찰스가 왕위를 물려받으면 이혼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는, 복잡한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4월 초의 결혼식도 교회의 결혼 예배가 아닌 윈저성에서 가족행사로 치러지며 식을 올린 뒤 교회의 축복을 받는 절차를 따로 갖게 된다. 결혼을 통해 커밀라는 그간 찰스 삶의 일부이면서도 자신을 숨겨야 했던 연옥 생활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죽은 다이애나와 비교당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주목받을 게 뻔한 그의 앞날은 여전히 순탄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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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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