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권재현]만약 광화문이 입을 연다면…

  • 입력 2005년 1월 31일 17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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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당시 광화문 모습
1926년 당시 광화문 모습
광복 60주년을 맞아 현판 교체 논란에 휩싸인 광화문. 만일 광화문이 입을 갖고 있다면 요즘 세태를 보고 뭐라 했을까.

그 심정을 대변한 듯한 동아일보 1926년 8월 11일자 기사가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허물기로 했던 광화문을 경복궁 동북쪽 현 국립민속박물관 자리로 옮겨짓는 것을 전하는 ‘헐려 짓는 광화문’이라는 기사다.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이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 까닭으로 헐리고 총독부 정책 덕택으로 다시 짓게 된다’로 시작되는 이 기사는 광화문에 빗대 당시 민족의 설움을 표현했다.

‘석공의 망치가 네 가슴을 두드릴 때 너는 알음이 없으리라마는 뚜다닥 소리를 듣는 사람이 가슴 아파하며 역군의 둔장이 네 허리를 들출 때에 너는 괴로움이 없으리라마는 우지끈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허리 질려할 것을 네가 과연 아느냐 모르느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 유니폼의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일장기 말소사건’(1936년)과 관련해 동아일보를 퇴사했다가 광복 후 복직해 주필과 부사장을 지낸 설의식(薛義植·1900∼1954) 선생이 사회부장 시절 쓴 이 기사는 한때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몇백 년 동안에 충신도 드나들고 역적도 드나들며, 수구당도 드나들고 개화당도 드나들던 광화문아! …그들을 맞고 그들을 보냄이 너의 타고난 천직이며 그 길을 인도하고 그 길을 가리킴이 너의 타고난 천명이었다 하면 너는 그 자리 그곳을 떠나지 말아야 네 생명이 있으며 그 방향 그 터전을 옮기지 말아야 네 일생을 마칠 것이다.’

분명 총독부를 비판한 이 구절이 요즘 세태를 나무라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 복원의 앞뒤 순서를 무시한 채 성급하게 현판부터 바꾸려 해 논란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역사의 부침을 묵묵히 지켜봤던 광화문은 여전히 ‘그 자리 그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원래 자리보다 14.5m 북쪽에서 경복궁의 중심축보다 약 5.6도 동쪽으로 틀어진 채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6·25전쟁 때 불탄 뒤 철근콘크리트로 ‘땜질’된 문루를 짊어진 채.

권재현 문화부 confetti@donga.com


동아일보 1926년 8월 11일자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이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 까닭으로 헐리고 총독부 정책 덕택으로 다시 짓게 된다.

원래 광화문은 물건이다.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며, 노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밟히면 꾸물거리고 죽이면 소리치는 생물이 아니라,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의식(意識) 없는 물건이요. 말없는 건물이라 헐고 부수고 끌고 옮기고 하되, 반항도 회피도 기뻐도 설워도 아니한다. 다만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땅을 같이한 조선의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아까워하고 못 잊어 할 뿐이다. 오랜 동안 풍우를 같이 겪은 조선의 자손들이 그를 위하여 울어도 보고 설워도 할 뿐이다.

석공의 망치가 네 가슴을 두드릴 때 너는 알음이 없으리라마는 뚜다닥 소리를 듣는 사람이 가슴 아파하며 역군의 둔장이 네 허리를 들출 때에 너는 괴로움이 없으리라마는 우지끈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허리질려할 것을 네가 과연 아느냐 모르느냐?

팔도 강산의 석재와 목재 인재의 정수(精粹)를 뽑아 지은 광화문아! 돌덩이 한 개 옮기기에 억만 방울의 피가 흐르고 기왓장 한 개 덮기에 억만 줄기의 눈물이 흘렀던 광화문아! 청태(靑苔) 끼인 돌 틈에 이 흔적이 남아 있고 풍우 맞은 기둥에 그 자취가 어렸다 하면, 너는 옛 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있으며 너는 그 신세 그대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칠 것이다.

풍우 몇 백 년 동안에 충신도 드나들고 역적도 드나들며, 수구당도 드나들고 개화당도 드나들던 광화문아! 평화의 사자도 지나고 살벌의 총검도 지나며, 일로(日露)의 사절도 지나고 청국(淸國)의 국빈도 지나던 광화문아! 그들을 맞고 그들을 보냄이 너의 타고난 천직이며 그 길을 인도하고 그 길을 가리킴이 너의 타고난 천명이었다 하면 너는 그 자리 그곳을 떠나지 말아야 네 생명이 있으며 그 방향 그 터전을 옮기지 말아야 네 일생을 마칠 것이다.

총독부에서 헐기는 헐되 총독부에서 다시 지어놓는다 한다. 그러나 다시 짓는 그 사람은 상투 짠 옛날 그 사람이 아니며 다시 짓는 그 솜씨는 웅건한 옛날의 그 솜씨가 아니다. 하물며 이때 이 사람의 감정과 기분과 이상아야 말하여 무엇하랴? 다시 옮기는 그곳은 북악을 등진 옛날의 그곳이 아니며 다시 옮기는 그 방향은 경복궁을 정면으로 한 옛날 그 방향이 아니다.

서로 보지도 못한 지가 벌써 수년이나 된 경복궁 옛 대궐에는 장림(長霖)에 남은 궂은 비가 오락가락한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하는 망치 소리는 장안을 거쳐 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달파하는 백의인의 가슴에 부딪친다.

▼설의식(薛義植)▼

(1900~1954) 언론인.

아호 小梧. 함남 단천 출생. 일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편집국장. 부사장. 새한민보 창간.

저서 : 수필집 『解放以前』 『花桐時代』 『小梧文章選』

역서 『亂中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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