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타고 태평양횡단 지명 스님 “삶은 흔들리는 배”

  • 입력 2004년 2월 12일 19시 34분


지난달 10일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항에서 길이 48피트(약 15m)의 요트가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요트 이름은 ‘바라밀다(波羅蜜多)’. ‘피안(彼岸)에 이른다’는 뜻이다. 20년 넘은 무동력 중고 요트에 몸을 실은 이는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주지 지명(之鳴·56) 스님 등 4명. 이 배는 풍랑을 헤쳐 가며 2000마일(약 3200km)을 나아가 출발 24일 만인 이달 2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닿았다. 이게 끝이 아니다. 지명 스님은 3월 초 하와이에서 다시 일본 오이타까지 6000마일(약 9600km) 항해에 나선다. 조계종의 중진 스님이 무엇이 아쉬워 이 위태로운 항해에 나섰을까.

“산 속에 있어야 할 스님이 요트로 태평양을 횡단한다니까 이상하죠? 제가 전생에 뱃사람이었는지 바다를 좋아합니다.”

그는 1988년 요트로 혼자 태평양을 횡단한 재일교포 김원일씨의 항해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이 일을 준비했다. 수행승으로서 안일한 자세를 깨고 목숨을 건 모험을 하고 싶었던 것.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업장(業障)을 녹이겠다는 서원(誓願)이었다.

“‘요트’ 라니까 사치스러워 보이지만 막상 타면 끊임없이 흔들리기 때문에 항상 긴장된 상태에서 지내야 합니다.”

초속 40노트의 바람을 만나면 돛이 울부짖듯 펄럭거린다. 방향 유지를 위해 손에 쥐가 나도록 돛 줄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5∼6m 높이의 파도를 뒤집어쓰는 것은 예사. 파도 꼭대기에서 수m 아래로 뚝뚝 떨어질 때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에 센 바람을 만나면 말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듭니다. 돌아간다면 누구에게나 잘 대해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요.”

무풍지대(無風地帶)도 걱정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꼼짝 않고 서 있는 것 역시 지옥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식사는 하루 한 끼. 갖고 간 누룽지를 불려 먹거나 컵라면으로 때웠다. 처음엔 해뜨는 시간에 맞춰 예불도 드렸지만 바람 불면 목탁을 들고 있을 여유도 없다.

“바다를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삶은 늘 요트처럼 흔들리는 것 아닙니까. 내면의 평화를 얻지 못하면 우린 항상 불안하죠.”

이번에 사찰 내의 행사 때문에 일시 귀국했다가 3월 초 다시 하와이로 건너가 두 달간의 사투를 벌여야 할 그의 얼굴엔 걱정과 근심보다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보은=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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