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4년 1월 5일 18시 24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할멈과 손주가 싸워대는 소리에 내리던 눈들이 놀라 공중으로 튀어오른다
싸우다 지친 할멈이 마루로 나와 쌈지에 넣어두었던 양귀비 열매를 씹는다
광란 일어났던 아랫배가 따스해져간다
함석지붕 쌓인 눈이 녹아내린다
- 시집 ‘섬들이 놀다’(창비) 중에서
‘오냐, 오냐’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버릇이 없어졌다. 사탕 쥐어주고, 쓰다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프던 놈이 눈엣가시다. 보다보다 호통 한 번 치니 바락바락 대든다. 재떨이, 성냥갑 던져도 용케 피하고 죄 없는 바람벽 앙가슴만 어이쿠! 앙살 부리던 사춘기 늦손자 붉은 혀 내밀어 ‘메롱’하고 할머니 쌈짓돈 훔쳐 마을로 달아난다.
서너 개 남은 이빨론 언제나 소화불량. 광란, 곽란 다 일어난 할멈 아랫배 오랜 양귀비 미인계에 겨우 진정된다. 그렇거나 말거나 겨울 하늘은 묵직한 구름 자루 뒤집어 떡살 쏟아 붓고, 김 모락모락 나도록 겨울 햇살 지피는데 저런, 까치 한 마리 짖는 바람에 아까운 시루떡이 함석 비탈을 타고 투두둑.
서산에 노루꼬리 넘어가고, 강어부 돌아오고, 앞마을 저녁연기 솔솔 오르면 손자놈 쭈뼛쭈뼛 고샅길 되오르고 할멈은 또 목 빼어 사립문 내다보겠지.
반칠환 시인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