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1호 팔미도 등대 ‘100년만의 소등’

  • 입력 2003년 12월 22일 18시 47분


코멘트
100년간의 임무를 다하고 등대 불을 끈 옛 팔미도등대(왼쪽)와 위성항법 보정시스템 등 최첨단 장비를 갖추고 새롭게 불을 밝힌 새 팔미도등대. -사진제공 인천지방해양수산청
100년간의 임무를 다하고 등대 불을 끈 옛 팔미도등대(왼쪽)와 위성항법 보정시스템 등 최첨단 장비를 갖추고 새롭게 불을 밝힌 새 팔미도등대. -사진제공 인천지방해양수산청
1950년 9월 15일 0시 켈로부대(대북첩보부대) 대원들이 인천 ‘팔미도등대’의 불을 밝혔다.

곧이어 인천 월미도 앞 해상에 정박 중이던 기함 마운트매킨리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이 상륙을 명령했다.

7만5000명의 병사를 태운 연합군 함대(261척)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팔미도등대를 길라잡이 삼아 월미도 해안에 상륙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이처럼 팔미도등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 등대의 효시(嚆矢)인 팔미도등대가 점등 10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代)를 이어 불을 밝힐 새 등대가 22일 준공됐기 때문이다. 옛 팔미도등대 바로 옆에 세워진 새 팔미도등대는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높이 31m의 등탑과 사무실, 전시실, 광장 등을 갖추고 있다.

1903년 6월 1일 인천 중구 용유동 산 372에 세워진 옛 팔미도등대는 지난해 1월 인천시 지방문화재 40호로 지정돼 영구 보존된다. 열강들은 한반도를 넘볼 때마다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팔미도에 눈독을 들였다.

일본은 인천 개항(1883년) 때 조선과 체결한 ‘통상장정’에 ‘조선은 통상 이후 각 항을 수리하고 등대를 설치한다’는 조항을 내세워 등대 건설을 강권했다.

조선은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그해 5월부터 팔미도등대 건설에 착수해 1년 1개월 만인 1903년 6월 등대를 완공했다.

사학자들은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에 대비해 팔미도등대 건설을 강권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옛 팔미도등대는 첫 점등 때 석유등을 썼지만 54년 자가발전시설을 갖춘 뒤 전기등을 사용했다. 91년에는 태양광발전시설을, 99년에는 위성항법 보정시스템을 설치하는 등 한국 등대의 발전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팔미도등대 허근 소장(58)은 “팔미도등대는 우리 민족과 고난을 함께해 온 역사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인천=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