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81년 피카소 출생

  • 입력 2003년 10월 24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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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후 유례없는 천재의 시대였던 21세기 초. 1905년 아이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했고, 1907년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마침내 물리학은 4차원 시공(時空)에 대한 통찰을 부여받았고 미술은 새로운 언어인 기하학을 발견했다. 런던대의 아서 밀러 교수는 “현대과학은 곧 아이슈타인이고, 현대미술은 곧 피카소”라고 단언한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당시로서는 도발이었고 스캔들이었다. ‘그림의 암살자’에게 비난이 빗발쳤다. 평생의 지기였던 마티스마저 고개를 갸웃했다. 낱낱이 찢긴 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이목구비…. 캔버스는 산산이 조각난 채 반짝이는 ‘유리 영혼’을 담고 있었다.

세잔이 대상의 형태를 극단까지 추궁했다면, 피카소는 이를 무자비하게 해체했다. 피카소는 말했다. “자연은 강간당하기 위해 존재한다.”

큐비즘을 창시한 그는 92세로 사망할 때까지 방대한 작품세계를 이루었지만 피카소 예술의 내적 동기는 성적인 충동이었다. 그의 ‘예술은 한 번도 정숙한 적이 없었다’.

피카소의 여인들은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半人半獸) 미노타우로스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압도됐다.

피카소가 46세 때 만난 17세의 마리 테레즈. 그녀는 버림받은 뒤에도 “하루 두 번씩 사랑의 편지를 보내라”는 명령을 충실히 따라야 했다. 프랑수아즈 질로는 21세 때 62세의 피카소를 만나 그를 ‘주인님’으로 불렀다. “나는 그를 위해 존재한다”고 했던 그녀는 그가 죽은 뒤 자살했다.

예술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창조를 위해서 지금의 것은 부정되어야 했다’.

“나는 12세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고 말했던 피카소. 그는 9시간씩 꼼짝 않고 서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정력적이었다. ‘라스메니나스와 생활’ 연작은 58점이나 되는 작품을 불과 2개월 만에 완성했다. 어떤 날은 하루에 15점까지 그렸다.

그는 말했다. “신(神)도 나처럼 많은 걸 시도했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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