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인생 2막 '제주의 꿈'

  • 입력 2003년 9월 25일 16시 16분


코멘트
“아빠, 방울이랑 더 놀아요.” 제주 남제주군 안덕면에 펜션 ‘늘바다 통나무집’을 운영하는 하동주씨(41)가족이 4일 저녁 노을이 깔린 바닷가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인생 2막의 장소로 제주를 택했다. 제주=이종승기자urisesang@donga.com

“아빠, 방울이랑 더 놀아요.” 제주 남제주군 안덕면에 펜션 ‘늘바다 통나무집’을 운영하는 하동주씨(41)가족이 4일 저녁 노을이 깔린 바닷가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인생 2막의 장소로 제주를 택했다. 제주=이종승기자urisesang@donga.com

많은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생 2막’에 대해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실은 ‘인생 1막’보다 그 이후의 2막이야말로 꽤 괜찮은 도전이 될 수 있다. 기쁨과 좌절을 동시에 맛보았던 1막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행복할 수 있다.

퇴직과 더불어 수동적으로 맞는 인생 2막은 물리적 나이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직업적 성공과 잘 교육시킨 자녀가 1막 성공의 척도였다면 2막에서는 사람과 자연에 대한 유대 관계가 행복의 토대가 된다.

보다 큰 변화를 위해 2막의 장소를 옮기기도 한다. 그들은 2막의 장소로 제주를 택했다. 그것은 하수상한 세상사에 등 떠밀려 생면부지의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과는 달랐다. 외떨어진 섬 기운이 곳곳에 호흡하는 곳, 그러나 비행기로 1시간 이면 서울에 닿는 장소, 그곳이 제주이므로.

●나의 사랑하는 생활

“나는 매일 아침 산책길에 아내와 함께 뜯는 들꽃을 사랑한다. 오늘도 아내는 강아지풀 한줌을 물 컵에 담아 정갈한 식탁보 위에 올렸다. 원두커피 기계에서 커피가 내려지는 냄새, 아내가 손님들을 위해 베이컨과 소시지를 굽는 냄새를 사랑한다. 푸치니의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가 곁들여지면 더욱 좋다.”

정태욱씨(55)는 2001년 제주에 온 서양화가다. 북제주군 애월읍에서 지난해 10월부터 펜션 ‘갤러리 하우스’를 운영한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살림집이 딸린 방 8개짜리 펜션 건물을 짓고 10평 남짓의 화실 별채를 따로 지었다.

미대를 졸업했지만 1970년대부터 마산에서 가업인 호텔을 운영하느라 그림 그리는 일은 소원했다. 역시 미대를 졸업한 아내 윤상숙씨(52)도 마찬가지였다. 두 아들이 다 커서 각각 사진작가와 건축학도의 길을 걷게 되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아내는 남편의 나이 50이 되던 해 “이젠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살자”고 제안했다. 정씨가 ‘꿈의 아틀리에’에서 제주의 들꽃을 그리는 동안 펜션을 관리하는 일은 아내 몫이다.

그는 제주에서 세 번 본 무지개를 사랑한다. 수평선, 지평선, 해안선…. 보면 볼수록 남성적인 제주의 선(線)을 사랑한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30대 자매가 운영하는 서귀포시의 공방에 들르는 일, 펜션 정원을 가꾸는 일, 내년 유럽 여행을 아내와 계획하는 일을 사랑한다.


제주에 정착한 사람 중에는 펜션을 운영하며 자연과 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종종 한데 모여 인생에 대한 계획을 공유한다. 제주=이종승기자urisesang@donga.com

●더 나은 2막을 꿈꾸며

서귀포시 여성회관 영어강사로 일하는 김동진씨(47)는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비철금속 관련 무역업체를 운영하다가 1999년 제주에 정착했다. 외환위기 때 사업에 실패해 캐나다 이민을 추진하던 중 아내와 함께 제주를 여행한 것이 계기가 됐다.

아내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해외에 가느니, 뭍에서 떨어진 제주에서 시작하자”고 했다. 1980년대 초 목재회사에 다닐 때 해외 지사에서 수년간 근무한 경험을 살려 김씨는 영어 강사가 됐다. 인생 2막은 1막과 유기적으로 엮여 전개되기도 한다.

전직 방송사 PD 김송원씨(56)도 1999년 제주에 왔다.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노인 쉼터 ‘넉넉한 오름’에서는 지역 노인들이 모여 탁구를 하거나 담소를 나눈다. 노인복지시설이 부족한 제주에서는 소중한 공간이다. 낮에 시설을 이용하는 현지인들에게는 무료, 가끔씩 다른 지역에서 여행 오는 노인들은 하루 3만원을 내고 머문다.

“지금 직업이 마지막은 아니다”라고 늘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던 김씨가 어느 날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 촬영 갔을 때였다. 하릴없이 소일하는 노인들이 불쌍해보였다. ‘나도 나이 들면 저들처럼 될까.’먼 훗날 노인 관련 일을 하겠다는 남편의 말을 줄곧 들어온 아내도 결국 동행해줬다.

그들은 텃밭에 갖가지 채소를 심으면서 먹을거리를 마련한다.

“부지런하면 사철 농사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쌀값만 만들면 되죠.” 아내와 함께 밭을 일굴 때면 정이 더욱 깊어졌다. 그들처럼 외지에서 들어와 정착한 이웃들과 먹을거리를 나누며 만드는 새로운 추억들도 즐겁다.

지난해 제주 남제주군 안덕면에 펜션 ‘늘바다 통나무집’을 지은 하동주씨(41)-김선미씨(37) 부부. 1997년 여행 왔다가 이곳 해안 노을에 반해 제주행을 결심했다.

그들의 인생 1막의 키워드는 가난이었다. 1990년대 초 부산의 지하 단칸방에 살면서 쌀 한 포대 살 돈 없어 늘 되로 사 먹었다.

찬스는 온다. 부산 초량동에서 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조명기구 사업을 시작한 것이 대박을 터뜨렸다. 하루에 1000만원을 거뜬히 벌었다. 그러나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으로 외상채권은 휴지 조각이 됐고, 주식투자에도 실패했다.

제주 땅 500평을 평당 18만원에 구입해 통나무집 4채를 짓는 데 건축비 4억원을 들였다. 집 짓는 데는 인부를 잘 쓰는 일이 중요하다. 인부들끼리 마찰로 건축이 늦어져 새벽까지 부부가 직접 욕실 타일을 붙였다. 주변에서는 돈 많은 철부지 부부로 오해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은 강아지 방울이, 옐리와 매일 해변가에서 뛰어논다. 부부가 함께 목공일을 하고 손님 이부자리를 세탁하는 일이나, 통나무집 창문을 통해 밤하늘 별을 보는 일 등은 2막에서 새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하씨는 말한다. “이미 펜션이 너무 많아요. 뚜렷한 테마를 갖추지 않고 막연한 환상으로 뛰어들기에 적합한 사업은 아닐 겁니다.”

●키스의 철학

9월 초 정태욱씨의 ‘갤러리 하우스’에서 조촐한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평소 정씨 부부와 친한 오찬영씨(42·농사)-김승미씨(35·제주시향 바이올린 단원) 부부가 음식을 준비해 왔다. 홍성직씨(47·의사)-유영신씨(47·국제회의 기획자) 부부, 김정기씨(52·목사)-김선자씨(48) 부부, 박성한씨(40·화가)-일본인 히카리 유야마씨(33·조명 연출가) 부부가 손님으로 초대됐다.

모두 도시에서 인생 1막을 마친 후 제주에서 2막을 가꾸는 사람들이다. 프랑스 유학 중 만나 올해 결혼한 박씨 부부는 동네 폐교를 작업실 삼아 그림을 그린다. 제주에는 예술 계통에 종사하는 해외 유학파가 꽤 있다. 20여년간 미국 뉴욕에서 의상 디자인을 하다 지난해 고향 제주로 돌아온 양순자씨(55·갈옷 제작업체 ‘몽생이’ 대표)처럼 ‘해외 리턴파’도 있다.

제주에서의 인생 2막은 만족스러울까.

“정신노동에서 벗어나 흙 냄새를 맡고 싶었다. 그 꿈을 이뤘다는 것으로 흡족하다. 비행기로 서울을 자주 왕래하기 때문에 절대로 고립된 삶이 아니다.”(양순자씨)

“고교생 아들은 캐나다에서 4년째 유학 중이다. 경남 거창고 교감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전원생활을 경험한지라 늘 그것을 동경했다. 1990년 제주에 온 후 아내는 자기 계발을 통해 40대 나이에 국제회의 기획자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제주에서 꿈을 이뤘다.”(홍성직씨)

“17평짜리 본채와 초가지붕을 얹은 10평짜리 서재 별채를 지어 살고 있다. 5세, 7세, 9세 세 명의 아이 교육을 위해 마음 맞는 학부모들과 만나 대안학교 설립을 논의했다. 제주에 온 사람들은 ‘키스(KISS)’의 생활철학을 갖고 있다. Keep it simple and small! 단순하고 작은 것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다.”(오찬영씨)

●제주에 정착한 사람들

몇 년 전부터 제주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 제주를 2막의 터전으로 삼아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풍광 좋은 곳에 집을 지어 도자기를 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갈옷을 만든다.

제주에 불어 닥친 펜션 붐도 외지인들을 유혹했다. 물 좋고 공기 좋아 ‘축복 받은 땅’인 제주는 사실 그다지 일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다. 이 때문에 자연을 벗 삼으며 돈도 벌려는 펜션 사업가들이 늘고 있다.

건강상의 문제로 요양 온 사람들, 사업부도 등 인생 1막의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 투자 목적으로 집을 사 두고 가끔씩 들르는 사람들도 다같이 섞여 산다. 그러나 생활의 필요에 의해서만 제주를 택한 외지인에 대해서는 토박이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제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곳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다시 뭍으로 간다.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람들에게도 고충은 있다.

“문화·의료 인프라가 대도시에 미치지 못한다”(김동진씨), “젊은 사람들이 전원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지면 다시 도시에 살게 될 때 적응하기 힘들지 모른다.”(오찬영씨)

제주는 예쁜 화면처럼 낭만적인 장소이지만은 않다. 자연과 사귀며 인생을 관조할 수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강인한 정신이 필요한 장소, 그곳이 제주이다.

제주=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6일 이왈종 화백이 서귀포시 자신의 작업실에서 제주 생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주=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제주에 온지 13년 된 이왈종 화백▼

이왈종 화백(58)의 집은 제주 서귀포시 정방폭포 지척에 있다.

나지막한 높이의 하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파란색 꽃잎 두 장 아래쪽에 흰 꽃잎 한 장을 살포시 숨긴 달개비가 겸손한 눈인사를 한다. 정원에는 수백 가지 이름 모를 들꽃들이 더불어 산다.

서울 추계예술대 교수를 그만두고 제주로 터전을 옮긴 것이 1990년.

“사람이 너무 많은 서울을 떠나 꽃과 대화할 수 있는 제주에서 다른 것 신경 안 쓰고 그림이나 실컷 그리다 죽겠다”는 그에게 사람들은 “돌았다”고 했다. 미술시장이 그리 좋지 않던 당시, 존경받는 교수직을 왜 포기하느냐고들 말렸다.

그의 작업실 오디오에서는 신비로운 선율의 뉴에이지 명상 음악 ‘붓다 바(Budda bar)’가 흘러나왔다. 국악인 황병기씨의 가야금 음반 ‘비단길’과 ‘미궁’도 눈에 띈다.

“가슴이 시원해 오지 않나요. 음악은 기(氣)를 높여주는 생명력입니다.”

그는 제주 생활 속의 소재들, 이를테면 하늘, 꽃, 물고기, 골프, 자동차, 텔레비전을 화폭 속에 자유롭게 풀어낸다.

“어차피 점 하나 콕 찍는 인생인데 작품의 시대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하지만 제주 생활은 분명 그를 변화시켰다. 서울에서 검은색 먹으로 실경 산수를 그리던 그는 제주에서는 노란색과 꽃분홍색처럼 “유치 발랄한” 원색을 주로 사용한다. 최근에는 집에 가마를 들여놓고 도자기 굽는 재미에 빠져 있다. 도자기 하나 완성하는 데 열흘 이상 족히 걸리고 실패도 많은 과정은 자기 수행과 닮은 점이 많다.

미련 따위의 사람 마음은 무처럼 단호하게 잘라내기 어렵다. 한동안은 서울 생각이 무성했다. 아내와 자녀는 “지루할 것 같다”며 서울에 남지 않았던가. 그는 나무를 깎는 입체 작품을 만들며 일부러 몸을 고단하게 하고, 몇 시간이고 큰 북을 두드리며 상념을 떨쳐냈다.

오전 3시부터 오후 1시까지 고요한 시간을 활용해 붓을 드는 그는 1주일에 두 번 골프를 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생활의 사치이다. 본래 먹은 마음과 달리 엉뚱하게 저만치 가는 골프공을 보며 혼잣말한다. “야, 이 놈아. 뭐하니.” “아이고, 바보야.” 이 말들은 그의 작품의, 그리고 인생의 화두기도 하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젊은 놈만 척척 잘도 받아주고 (내 공은) 늙었다고 괄시하는” 열여덟 홀 덕분에 제주의 시간은 풍요롭다.

“하루 세 끼 걱정 없이 먹고, 지천에 그림 소재가 널려 있으니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림은 떠나보낼 때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치를 깨닫습니다. 젊었을 때 호기를 부려 아무에게나 쓱쓱 그려준 그림은 결국 큰 상처로 되돌아옵디다.”

하고 싶은 일을 원 없이 할 수 있는 제주 생활의 핵심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와 만나는 일이다. 그는 오후 5시 이전에는 아예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외따로 떨어져 있어도 좋은 공연이나 제 할 일 잘하는 사람들의 반가운 소식은 어김없이 전해온다.

그는 맑게 닦인 작업실 유리창에, “새가 부딪혀 다칠까봐” 검은 빛깔 새 두 마리를 그려 넣었다. 황룡사 벽에 그린 늙은 소나무 그림(‘노송도’)이 진짜인 줄 알고 새가 날아와 부딪혔다는 신라 화가 솔거처럼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제주의 자연은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다.

제주=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