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뒤늦은 전성기]"내게 청춘은 워밍업에 불과했다"

입력 2003-07-24 16:22수정 2009-10-1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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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5세의 나이로 프로 입문 이후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현대 유니콘스 포수 김동수. 나이 들어서도 개발가능성이 있는 근력을 강화한 것이 뒤늦게 전성기를 맞게된 이유로 꼽힌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나의 두뇌는 50이 넘어 더 명민해졌다. 판을 짜는 안목은 바다처럼 넓어졌고, 수를 읽는 능력은 계산기처럼 정교해졌다. 두고 보라. 내 지적 능력은 앞으로도 황야를 달리는 들소처럼 거침없이 발전할 것이다.”(1981년 56세의 나이로 일본 바둑 랭킹 1위 기세이(棋聖)전 5연패를 이룬 후지사와 슈코 9단의 당시 인터뷰)

“37이라는 나이는 단순한 숫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 숫자가 ‘투사로서의 능력’을 빼앗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늙었다고 나를 얕잡아보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지금 당장 링으로 올라와 내 주먹과 킥을 맞아 보라. 나는 여전히 세계 최강이며 이번 시합에서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다.”(네덜란드 킥복서 어네스트 후스트의 2002년 12월 인터뷰. 37세였던 그는 인터뷰 직후 도쿄돔에서 열린 ‘K-1 월드 그랑프리’ 토너먼트 대회에서 7만45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합 격투기 세계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한 인간의 전성기는 언제 찾아올까. 분야마다 ‘그때가 그 사람의 전성기였다’고 말할 만한 ‘때’가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일반인들의 상식과 크게 벗어나는 시기에 전성기를 열어 나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체(體)예(藝)지(智) 세 분야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한 사람들의 능력 분석을 통해 분야별로 사람의 전성기가 어떻게 찾아오는지를 살펴봤다.

●김동수, 35세에 발전하는 근력

현대 유니콘스 포수 김동수(35). 올해 전반기 타율 0.306(11위) 12홈런 45타점. 이는 프로 입문 14년 만의 최고 성적으로 그가 ‘한국 최고의 포수’로 대접받던 90년대 중반보다도 나은 기록이다.

김동수는 지난해까지 단 한번도 타율 3할을 넘지 못했다. 홈런도 92년과 98년 20개를 친 것이 최고. 2000년 LG에서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주전 자리를 빼앗겼고 지난해에는 0.243, 홈런 11개의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김동수는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어느 때보다 열심히 훈련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그 효과가 근력의 강화로 나타났다고 평가한다.

김동수는 올해 전반기에만 12홈런을 날릴 정도로 힘이 붙었다. 경인방송 구경백 해설위원은 “김동수가 올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어느 해보다도 열심히 소화했다”며 “하체 힘이 특히 좋아져 타격할 때 안정성이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35세 나이에 ‘힘’이 좋아지는 게 가능할까. 구 위원은 “40대 이하라면 근육은 훈련 양에 따라 발전 정도가 결정되며 나이가 들었다고 근력이 쇠퇴하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김동수도 “올해 웨이트트레이닝 때는 90년대 중반보다 오히려 조금씩 더 무겁게 들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순발력은 나이가 들수록 떨어진다는 평가. 어깨가 약한 김동수는 포수의 실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인 2루 송구 능력을 기르기 위해 푸트워크 연습을 집중적으로 했다. 앉은 자세에서 일어서기까지의 시간을 단축함으로써 송구하는 시간을 줄이겠다는 의도. 그러나 도루 저지율은 3할대로 8개 구단 포수 중 4위. 반복 연습을 했지만 공을 잡은 뒤 순간적으로 일어서는 ‘순발력’에서는 큰 향상이 없었다는 것.

물론 일반인들은 훈련을 통해 30대 중반에도 순발력이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상당 수준의 순발력을 갖춰 발전하기에는 한계에 이른 운동선수들은 나이가 들어 훈련을 많이 한다고 이 능력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

이런 현상은 미국 메이저리그 홈런왕 배리 본즈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본즈는 근력의 상징인 홈런, 순발력의 상징인 도루 두 분야에서 최고의 성적을 올린 호타준족(好打駿足)의 상징. 올해 사상 처음으로 500홈런-500도루의 대기록을 달성했으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한 시즌 40홈런-40도루(1996년)를 뛰어넘은 단 3명 가운데 한 명.

그러나 매년 비슷한 숫자를 올리던 도루와 홈런이 34세였던 1998년부터 크게 불균형을 나타냈다. 올해 39세인 본즈는 전반기 30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내셔널 리그 홈런 순위 단독 선두를 질주 중이지만 도루는 고작 7개뿐이다. 2001년에는 37세의 나이로 한 시즌 최다 홈런(73개) 기록을 세웠지만 그해 도루 숫자는 고작 13개였다. SBS 박노준 해설위원은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순발력과 근력의 불균형은 모든 분야의 운동선수에게 일반적인 현상”이라며 “따라서 순발력보다 근력을 요구하는 종목일수록 늦은 나이에 전성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백건우, 50대에 다시 인정받은 기량

1967년 세계의 문화적 ‘변방’으로 여겨지던 한국에 낭보가 날아들었다. 백건우라는 21세의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나움버그 콩쿠르의 우승을 거머쥐었다는 뉴스였다. 2년 뒤 그는 리벤트리트 콩쿠르 결선에 진출하고 부조니 콩쿠르 금상까지 안았다. 한국인 누구나 피아노라면 반사적으로 ‘백건우’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74년 젊은 피아니스트는 파리에 정착했다. 미수로 그친 북한의 납치공작 등으로 70년대 뉴스의 초점이 되기도 했지만, 80년대의 그는 고국 팬들에게 ‘조용하게’ 비쳤다. 파리에서 크고 작은 연주회를 열고 있다는 소식이 간혹 들려올 뿐이었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몇몇 소식에 빠른 음악 팬들이 그를 ‘재발견’했다. 91년 염가 CD레이블인 낙소스에서 발매한 프로코피예프 피아노협주곡 전집이 프랑스의 권위 있는 음반상 ‘디아파종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어 리스트 스크랴빈 라흐마니노프 멘델스존 등의 작품집이 잇따라 출반됐다.

98년 세계 5대 메이저음반사의 하나인 BMG가 쉰 두 살의 그에게 손을 뻗쳤다. ‘그라머폰’ ‘디아파종’ 등 음반 전문지들은 RCA레이블로 출반된 그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집에 대해 ‘건반 위의 거인(Titan)’ 등의 화려한 수사를 아끼지 않았다. 2000년에는 세계 최대 음반사인 유니버설로 소속사를 옮긴 뒤 ‘포레 무언가집’을 내놓았다. 이 음반에는 세계적 권위의 음반상인 ‘디아파종 금상’이 주어졌다. 같은 해 그는 프랑스 ‘문화기사훈장’을 받았다.

“음악예술의 특성상 하루아침에 예술성이나 테크닉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는 없다. 내 경우 굳이 말하자면, 항상 같은 속도로 계속해오던 작업에 사회적 인정이 따라온 것뿐이다.”

백건우 자신은 주관성이 강한 예술 분야에서 기량의 성장과 사회적 인정 사이의 시간차가 클 수밖에 없다는 점을 뒤늦은 전성기의 이유로 들었다. 갑자기 연주회나 음반에서 폭발적인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와 한순간에 이름이 알려지는 일은 드물다는 것.

음악평론가 김동준씨는 “백건우는 20대부터 라벨 드뷔시 리스트 스크랴빈 등 일정한 작곡가의 작품을 전곡 연주하는 ‘집중탐구’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조금씩 성장시키는 내향적 방식으로, 한순간에 인정받는 방법은 아니다”라고 분석을 보탰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로서 육체적 기량의 경우 일반적으로 20대에 절정이 찾아오며, 근육과 관절 기능의 쇠퇴로 인해 물리적인 테크닉은 점차 퇴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건우는 “내 경우 20대 초에 거의 모든 테크닉을 마스터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연습을 하면서 연주하기 편한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나간다는 점도 도외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85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연주를 계속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예로 들면서 “연습을 통해 기교의 쇠퇴는 상당 부분 노년기까지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주가들은 나이가 들면서 리스트와 같은 화려한 기교의 연주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내면적으로 신중해져 브람스와 같이 내향적인 작품에 끌리게 된다.”

백건우는 내년부터 브람스를 집중 탐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백건우 , 가토 마사오

●가토 마사오, 55세에 전성기

지난해 7월 일본 바둑 기사 가토 마사오(加藤正夫) 9단이 55세의 나이로 일본 상금랭킹 3위 기전인 혼인보(本因坊) 타이틀을 획득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가토의 전성기는 79년 일본 7대 기전 중 5대 기전을 석권했을 32세 시절. 가토는 93년 왕좌 타이틀 획득을 끝으로 7대 기전 타이틀을 따지 못한 채 바둑계에서 잊혀져 갔다. 그러던 그가 야마시타 게이고(25), 하네 나오키(27), 요다 노리모토(37), 장쉬(23) 등 젊은 기사들을 제치고 지난해 일본 3대 기전 챔피언에 오른 것.

바둑은 몇 십 수 뒤를 내다보는 정교한 수읽기(계산 능력)와 수 천 가지 정석의 숙지(암기력), 수 만 가지 변화에 대응하는 지적 순발력 등이 필요한 고급 두뇌 스포츠. 특히 조기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분야로 최근 한국에서는 이세돌, 원성진, 조한승 등 10대 이전부터 집중적인 훈련을 받은 젊은 기사들이 바둑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가토가 혼인보 타이틀을 획득한 후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승인 분석.

“타이틀전을 앞두고 수읽기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는데 효과가 있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머릿속에 바둑판을 떠올리며 문제를 내고 답을 찾았다.”

이에 대한 요다 9단의 평가.

“그의 승리는 ‘노장의 투혼’ ‘정신력의 승리’라고만 말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실수가 거의 사라졌고 싸움 때 보여준 정교한 수읽기는 전성기에 비해 오히려 나아 보였다. 그의 실력은 분명히 과거에 비해 향상됐다.”

55세의 나이에 지적 능력이 발전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전문가들은 몇 가지 전제만 충족된다면 바둑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첫 번째 전제는 두뇌 발달을 좌우하는 어린 시기에 체계적이고 충분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점. 바둑계에서는 계산 능력과 지적 순발력 등이 확립되는 시기를 5∼15세로 본다. 윤기현 9단은 “이 무렵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않으면 노년에 아무리 노력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53년생 동갑내기로 70, 80년대 한국 바둑계의 쌍벽이었던 조훈현 서봉수 9단이 최근 실력 차이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설명.

조 9단은 10세 때 일본 세고에 도장에 입문해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고 서 9단은 동네 기원에서 체계적인 훈련 없이 스스로 실력을 닦았다. 50세인 지금 조 9단은 세계 정상급 실력을 과시하지만 서 9단은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뚜렷한 하향세다.

두 번째 전제는 ‘발전 가능한 분야’에 집중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는 점. 가토는 지난해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수를 빨리 읽으려 하는 대신 천천히, 정확히 읽는 연습을 했다”고 밝혔다.

최규병 9단은 “40이 넘으면 아무리 훈련을 해도 수를 빨리 보는 순발력은 길러지지 않는다. 대신 정확성은 훈련에 따라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퇴화하는 능력을 붙잡고 매달리기보다 발전 가능한 분야에 집중해 훈련하는 것이 ‘총체적인 능력’ 상승에 도움이 된다는 것. 제한시간이 한 사람 당 10시간이나 주어지는 혼인보 기전의 특징상 ‘빨리’보다 ‘정확히’에 치중한 가토의 훈련은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게 최 9단의 평가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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