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이후 10년만의 시집내는 이성복시인

입력 2003-06-18 18:31수정 2009-09-29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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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갈망과 절망 사이에서 울컥거렸다.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를 급하게 번갈아 밟기 일쑤였다. 그렇게 시(詩)와 불화(不和)한 세월은 길었다.

시인 이성복(51·계명대 문예창작과 시인)이 이달 말경 다섯 번째 시집을 펴낸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3) 이후 10년 만이다.

이성복은 ‘진지한 시인’이다. 문학평론가 김화영 교수(고려대)는 “주지적인 인격을 가진, 그러나 비관적인 서정시인이다. 그는 한때의 느낌보다는 한 시기의 내면적인 성찰을 줄기차게 밀고 나간다”고 평했다.

시인 이성복은 “성질 못된 사람이 맺힌 게 있어서 글도 잘 쓴다. 한때 내게 아주 큰 앙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모든 것들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대구=조이영기자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 동안 시인은 은둔해 있었지만 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김수영문학상 수상)를 비롯해 ‘남해금산’과 ‘그 여름의 끝’은 여전히 많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인간 존재의 문제에는 서정성이 오롯이 깃들어 있다.

대구의 작업실에서 시인을 만났다. 긴 시간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시 안 쓰고 테니스 치고 놀았지요. 그러나 시험 기간에 만화가게에서 낄낄댄다고 해서 마음까지 편하겠습니까. … 내면에서 들끓는 욕망, 곧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강박관념을 떨쳐내 버릴 수 있었던 것이 시간을 심어 거둔 큰 수확입니다.”

인터뷰에 앞서 시인은 e메일로 새 시집의 원고를 보내주었다. 파일 ‘아, 입이 없는 것들.hwp’를 열었다. 그는 ‘지난 세월 씌어진 것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엮어 읽으면서, 해묵은 강박관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길은 돌아 나올 수 없는 길. 시는 스스로 만든 뱀이니 어서 시의 독이 온몸에 퍼졌으면 좋겠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은 곤혹의 지지부진이다’라고 ‘시인의 말’에 적어두었다.

“자의식과 신경증적인 야심이 나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남보다 잘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죠. ‘나는 안돼’라는 말은 ‘나는 꼭 되고 싶어’의 다른 표현이 아니던가요. 일종의 열등감과 ‘나는 괜찮은 놈’이라는 생각이 뒤엉켜 나를 괴롭혔습니다. 나는 마조히스트적이거든요.(웃음)”

그는 시를 잘 쓰기 위해 “오만 호들갑과 고통에 몸부림치던” 사람이었다. 다른 시인의 시를 베껴서 읽고 또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글쓰기에 좋다는 ‘약’은 뭐든 구해 먹었던 그였다. 그러던 가운데 외국 시에 대한 짧은 시평을 일간지에 연재하면서 그는 ‘글의 길’을 보았다.

“이렇게 글을 만드는구나, 하고 무릎을 쳤지요. 그 후로 시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쓰더라도 내가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 시로구나. 영감을 받아서 쓰건 수학문제 푸는 것처럼 쓰건 결과는 같다는 것이죠. 작가의 의도보다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얻는 부분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경기고와 서울대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쳐 교수가 된 그는 ‘밑바닥 체험’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입에 올렸다. 그는 인생의 저 깊은 곳까지 겪어낸 이들을 시기했던가. ‘…나는 나를/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는 시인의 고백이 떠올랐다.

“떼를 쓰다 꿀밤 맞고 울다 굶고 자는 아이가 되지 않겠다”, “쓸데없이 징징대고 싶지 않다”는 그는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신의 몫을 이제야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장옥관 시인이 그에게 선물했다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돌에는 자연이 그려져 있다. 그는 시의 경지가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박수근의 그림 같지요? 아, 어떻게 이런 무늬가 돌에 새겨졌을까. 시도 그런 것일 거야. 기필코 찾아내야 하는 보물찾기 같은 것이 아닌….”

‘겨울날 키 작은 나무 아래/종종걸음 치던/그 어둡고 추운 푸른빛, //지나가던 눈길에/끌려나와 아주/내 마음 속에 들어와 살게 된 빛 //어떤 빛은 하도 키가 작아,/쪼글씨고 앉아/고개 치켜 들어야 보이기도 한다’(‘그 어둡고 추운, 푸른’)

키 작은 어떤 빛을 보기 위해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지난 세월 씌어진 것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엮어 읽으면서,

해묵은 강박관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길은 돌아 나올수 없는 길.

시는 스스로 만든 뱀이니 어서 시의 독이 온몸에 퍼졌으면 좋겠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은 곤혹의 지지부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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