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준8단의 결정적 장면]제7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전

  • 입력 2003년 3월 28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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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배 세계기왕전 결승 4국이 열린 27일은 국내 바둑계에서 기억할 만한 날이 될 것 같다. 금성철벽 같던 이창호 왕국이 이세돌 3단의 세 차례 공습 앞에 허무하게 무너진 것. 이 9단이 20대일 때 그의 왕국이 붕괴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 3단의 과감하고 빠른 창이 이 9단의 두꺼운 방패를 뚫어버렸다. 》

▽기자=이 9단이 이번 결승전에선 매우 이상했어요. 1국과 4국에서 간단한 수를 깜빡해서 패배의 구렁으로 빠졌죠. 평소 이 9단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실수였죠. 이 3단을 만나면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무너집니다.

▽김 8단=이 9단이 이 3단을 대할 때 거북한 느낌이 있나봅니다. 당돌한 후배가 치고 올라오는 기세에 왠지 눌리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바둑을 둘 때 그것이 자꾸 이 9단의 판단을 방해하는 것 같아요.

▽기자=이번 바둑도 그랬죠.

▽김 8단=이 3단이 흑○를 못 봐 하변 백이 모두 잡혔는데요, 장면도 백1로 끊었을 때 흑2가 이해할 수 없는 수입니다. 당연히 ‘가’로 내려빠져야 했어요. ‘가’로 뒀을 때 백이 실전처럼 둔다면 흑이 ‘나’로 끊은 뒤 ‘다’로 먹여치는 수가 있어 백을 몽땅 잡습니다.

▽기자=다 잡혀있던 하변 백대마가 살아서는 승부가 끝났죠.

▽김 8단=추측이긴 합니다만 아마 상대가 조훈현 9단이었다면 이 9단이 ‘가’를 쉽게 봤을지도 모릅니다. 조 9단은 이 9단이 이길 수 있는 상대, 스타일이 익숙한 상대죠. 하지만 이 3단은 늘 뻑뻑한 상대, 아직 낯선 상대입니다. 가장 편안한 상태의 생각 회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자=백1이 상대의 그런 심리까지 이용했을까요.

▽김 8단=이 3단이 의도적으로 했다고 보긴 힘들지만 백1로 응수타진한 순간이 아주 절묘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승부의 운이고 기세이자 승부감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백1이 놓여졌을 때 이 9단은 하변에서 백대마를 잡는 뜻밖의 성과를 거둔 데다가 상변에서는 상대방의 저돌적 승부수를 간단하게 막아냈습니다. 그 상태에서 ‘이젠 끝났다’는 순간적 방심과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튼튼하게 두면 된다’는 의식이 이 9단을 지배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무심코 찔러간 듯한 백1에 가장 튼튼해 보이는 흑2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던 거죠.

▽기자=이 3단의 바둑은 강렬하면서도 항상 아슬아슬한데요.

▽김 8단=이 3단은 유리해도 쉽게 이기는 길로 가지 않아요. 이 바둑도 반면으로 비슷한 승부인데 끝내 ‘라’로 젖히는 패를 냈어요. 이 3단은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처럼 달려듭니다. 그게 이 9단을 오히려 위축시키는 효과를 냈을 거예요. 가끔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 3단의 폭주기관차는 대단해요. 레일에서 벗어나도 그냥 힘으로 밀어붙여 길을 만들어 버리거든요.

▽기자=국내에선 후배 기사에게 한번 밀렸다가 다시 1인자로 복귀한 경우가 없는데요.

▽김 8단=하지만 이 9단은 아직 20대입니다. 앞으로 5∼10년은 이-이의 대결이 정말 볼 만할 겁니다. 누가 이길지 예측할 수 없는….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이창호-이세돌 인터뷰▼

27일 LG배 세계기왕전 4국이 끝난 뒤 이세돌 3단과 이창호 9단은 나란히 앉아 인터뷰를 했다. 승자와 패자가 함께 인터뷰한 것도 바둑계 역사상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평소 웃음이 없는 이 9단이 인터뷰 내내 미소를 보여준 것도 의외였다. 그들은 20여분간 인터뷰에 응했는데 비슷한 질문에 대한 두 사람의 답변이 그들의 기풍만큼이나 묘하게 엇갈렸다.

―2년 전 이 대회 결승 때와 비교해서 어떤가.

“그 때에 비해 이 3단의 감각이나 승부 호흡이 좋아진 것 같다. 계속 노력해온 탓인지 원숙한 기량같은 것이 느껴졌다.”(이 9단)

“2년 전이 가장 절정기였던 것 같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자신감도 부족하고 수읽기 능력도 떨어졌다. 지금은 자신감이 없어 많이 참는 편이다.”(이 3단)

―상대는 어디가 강한가. 이번 승리를 놓고 검토실에선 이 3단의 끝내기도 많이 좋아졌다고 하던데….

“특별히 찍어서 말하기가 어렵다. 아까 말했던 대로 승부감각이 좋아졌다. 아니 원래부터 셌는지도 모르겠다. 바둑이 미세하게 간 적이 없어서 (이 3단의) 끝내기 계산력이 좋아진 것은 잘 모르겠다.”(이 9단)

“창호형의 중반전이 무섭다. 수읽기가 완벽하다. 함부로 내 바둑을 둘 수 없다.”(이 3단)

―후배들과 둘때의 부담감은 어떤가.

“2년 전 이 3단이라는 후배기사와 둘 때는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대국 중에도 그 생각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단 확실히 부담이 적다.”(이 9단)

“나보다 어린 후배들이라고 해봐야 세살 정도 차이니까 아직은 나이가 그렇게 부담되지는 않는다.”(이 3단)

―이 9단은 ‘단일시즌 그랜드슬램’이라는 기록을 놓쳤고 이 3단은 올 목표를 이뤘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이 3단에게) 이기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평소 페이스를 잃은 것은 아닌데 자꾸 이 3단의 페이스로 말려 들어가니까 (이 3단이) 대단하다. 기록이라는 게 특별히 의식해서 되는 게 아니다. 되면 좋고 안되면 최선을 다한 걸로 만족한다.”(이 9단)

“올 목표는 이뤘지만 또 우승하겠다. 이번에 한 번 이긴 것에 만족하지 않고 또 이기도록 하겠다.”(이 3단)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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