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철학계 거목' 존 롤스 타계

  • 입력 2002년 11월 26일 18시 12분


분석철학이 풍미하던 20세기 영미 철학계에서 사회철학과 윤리학을 되살린 거목으로 평가돼온 존 롤스 교수가 24일 타계했다. 향년 81세.

그가 몸담았던 미국 하버드대학측은 “롤스 교수가 90년대 중반부터 뇌중풍으로 투병해왔으며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1921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태어난 롤스 교수는 프린스턴대학과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고 62년 하버드대 철학과 교수로 임용된 뒤 ‘정의론’(1971·사진) ‘정치적 자유주의’(1993) 등 명저를 펴내며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는 투병 생활을 하던 99년에도 두 저서에 나타난 정의관을 국제관계와 국제법에 확대 적용한 ‘만민법’을 발간하는 등 몸이 조금만 회복되어도 연구와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하버드대 철학과에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로 인해 형이상학 철학이 주류를 이루던 하버드대 철학과는 교수진의 반이 윤리학자들로 채워졌다.

롤스 교수의 역작 ‘정의론’은 발간과 동시에 인문사회과학의 고전 반열에 올랐다. 롤스 교수는 이 책에서 정의는 철학적 진리나 종교적 신념이 아닌 사회적 합의의 대상이라는 독창적 이론을 제시해 20세기 사회철학의 기반을 닦은 존 로크와 토머스 홉스 등에 버금가는 입지를 확보했다.

그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자유주의에 평등주의의 장점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나눠 가져야 한다는 ‘정의의 원칙’을 기반으로 하되, ‘장애인 고용법’처럼 최소 수혜자의 처지를 개선시키는 한도 내에서 약자를 우대하기 위한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차등의 원칙’을 제시했다.

롤스 교수는 타고난 재능과 가치관, 사회경제적 지위와 이해 관계를 넘어 ‘정의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에 따른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무지(無知)의 베일(Veil of Ignorance)’ 이론을 창안해냈다.

‘무지의 베일’은 가상의 장치였으나 그는 이를 통해 합의의 정당성을 보장하고 ‘정의의 원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조건과 절차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그는 공정한 몫의 배분을 강조하는 ‘분배적 정의론자’와 대비되는 ‘절차적 정의론자’(공정한 배분의 과정을 중시)에 속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정의로운 국가는 최소 수혜자를 위한 차등이나 불평등이 공정한 ‘절차’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나라를 뜻하며, 한 사회의 불평등한 제도도 최소 수혜자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일 때만 허용될 수 있다.

그는 이같은 두 원칙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정의 사회’로 규정하면서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신념과 이념 체계를 지닌 집단들이 다양하게 공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이론은 올해 1월 타계한 로버트 노직 전 하버드대 교수의 자유주의 사회철학에 비해 평등주의를 강조하는 것으로 평가됐으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90년대 이후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제3의 사회철학 모델로 서구사회에서 다시 주목을 받아왔다.

하버드대 동료인 힐러리 푸트남 교수는 “롤스 교수는 어떻게 선을 행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직접 보여줬다”면서 “그의 업적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롤스 교수는 2차세계대전에 참전해 인간의 악행을 목격했지만 개선 가능성을 믿고 스스로 ‘현실적 이상주의’라 부르는 태도를 평생 견지한 낙관주의자였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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