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혈우병도 기막힌데 에이즈까지”… 감염자들 '절망의 나날'

  • 입력 2002년 9월 13일 18시 26분


에이즈 감염자가 매혈(賣血)한 원료로 만든 국산 혈우병 치료제가 에이즈 집단 감염의 원인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온 뒤 에이즈에 감염된 혈우병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실태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한 고교생은 처지를 비관해 투신 자살했고 어떤 환자는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모른 채 여자 친구를 감염시키기도 했다.

에이즈에 감염되면 보통 7∼10년 뒤 증상이 나타나므로 90년대 초반에 에이즈에 집단 감염된 혈우병 환자 대부분은 얼마 전부터 증상이 나타났다.

혈우병 환자를 정기 검진하고 있는 의사 A씨는 “어릴 때 에이즈에 걸린 한 혈우병 고등학생이 몇 년 전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얘기를 다른 환자로부터 전해들었다”고 밝혔다.

93년에 국산 혈우병 치료제를 주사 맞고 에이즈에 걸린 한 혈우병 환자는 혈우병 때문에 관절을 쓸 수 없게 돼 두 다리를 모두 절단했다. 더구나 부인마저 에이즈에 걸린 남편과 살 수 없다며 가출해 살 길이 막막한 실정이다.

또 다른 혈우병 에이즈 환자 B씨는 “정부는 이번에도 수혈로 감염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한 번도 수혈을 받은 적이 없다”며 격분했다. B씨는 91년 설립된 한국혈우재단에 등록한 뒤 첫 검사를 했을 때에는 에이즈 음성반응을 보였으나 국산 혈우병 치료제를 맞은 뒤 에이즈 양성반응이 나타났다.

초등학생 시절 국산 혈우병 치료제 주사를 맞은 뒤 에이즈에 걸린 C씨는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지만 자신이 에이즈 환자인지 모른 채 살고 있다. 자식에게 혈우병을 물려준 데다 에이즈까지 감염되자 부모들이 미안한 나머지 지금까지도 감염 사실을 알려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

혈액 측정 결과 C씨는 CD4+T임파구의 수치가 50(정상인은 1000)도 안 돼 이미 말기 에이즈 환자인 상태. C씨를 돌보고 있는 의사는 “이제 대학생이 됐고 워낙 상태가 악화돼 본인에게 직접 알려주려 했으나 부모가 여전히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의사는 “역시 어린 시절 에이즈에 감염된 한 혈우병 환자는 에이즈 감염 사실을 모른 채 성인이 된 뒤 여자친구를 에이즈에 감염시킨 사례도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혈우병 환자들은 “문제의 혈우병 치료제를 생산한 제약사는 에이즈뿐 아니라 A형 간염에 집단 감염시키고도 안전한 유전자 재조합 혈우병 치료제의 수입을 방해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전자 재조합 방식으로 만든 혈우병 치료제는 기존의 치료제와 달리 혈액을 원료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다. 하지만 문제의 제약사가 한때 수입 제한을 요구해 환자들과 마찰을 빚었으며 결국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최근 수입허가 방침을 세웠다.

혈우병 환자와 부모의 모임인 코헴회 관계자는 “국산 혈우병 치료제 때문에 에이즈에 집단 감염됐다는 소문은 몇 년 전부터 나돌았지만 에이즈 감염자가 매혈한 혈액이 섞여 들어간 사실은 전혀 몰랐다”며 “14일 환자 모임을 갖고 대책을 세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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