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2년 7월 4일 16시 20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6월 29일∼7월 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03년 봄, 여름 남성복 프레타포르테’의 첫날, 루이뷔통의 쇼룸에서 터져나온 탄식이다. 루이뷔통의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는 전형적인 회색 비즈니스 슈트에 오렌지, 그린, 그레이프 등 혀를 갖다대면 새콤달콤한 맛이 전해질 것만 같은 색상의 등산용 슬리브리스 패딩점퍼를 과감하게 매치했다.
파리와 밀라노는 이제 막 2003년 봄 여름 남성 패션 전개에 관한 전략 수립을 마쳤다. 세계 각국의 남성복 디자이너와 업계 관계자들은 6월 23∼27일 ‘2003년 봄, 여름 밀라노 남성복 컬렉션’을 본 뒤 일제히 파리로 날아가 파리지엔들의 ‘작전계획’을 살폈다. 파리와 밀라노의 쇼룸을 옮겨다니는 틈틈이 ‘2002 한일월드컵’의 준결승, 결승까지 관람하느라 패션계 사람들에게는 분주한 출장이었다.
●스포츠의 승리
![]() |
루이뷔통 쇼에서 패션관계자들에게 충격을 준 아이템은 루이뷔통을 상징하는 ‘LV’ 로고가 겉면에 여러 개 박힌 침낭이었다. 회색 정장 허리춤에 야영용 회색 침낭을 멘 모델이 등장하자 세계 각국의 언어로 속닥거리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슈트 바지를 밝은 색상의 등산용 부츠와 매치해 밑단을 접어넣는 코디네이션도 모든 의상에 적용됐다. 지난 2, 3년간 남성패션계를 강타한 스포츠라는 화두가 조깅, 축구에서 등산으로 확장된 것이다.
발랄한 색상에 승부를 건 이번 쇼에서 스타 디자이너 제이콥스가 선택한 색상은 보라, 주황, 초록색이다. 캐주얼한 보라색 상의에 오렌지색 바지, 초록색 운동화를 매치하거나 오렌지색 셔츠에 회색 바지, 보라색 신발을 함께 매치하는 등 바지 셔츠 등산화 등에서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조화를 이루었다.
스포츠가 화두라고 해도 마초적인 남성미는 아니었다. 모성애를 자극하는 연약해 보이는 남성 모델들의 사뿐사뿐한 발걸음을 감싸는 등산화며 물통, 야외용 가방, 침낭 등은 오히려 여성들에게 더 어필할 만큼 사랑스러운 색상, 디자인이었다. 모델들의 머리를 귀 아래 3㎝ 이상 기른 뒤 자연스럽게 넘겨 뒤로 묶은 ‘꽁지머리’ 스타일 또한 영국 축구팀 베컴의 모히칸 머리와 브라질팀 호나우두의 반달머리가 잊혀질 올 가을 쯤이면 유행에 민감한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트렌드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있다. 단, 가는 머리끈 역시 상의 하의 또는 신발 중 하나와 동일하게 선명한 원색으로 매치해야 세련돼 보인다.
제이콥스의 의상이 ‘달콤한 캔디’였다면 장 폴 골티에는 ‘매력적인 불량식품’이었다. 이번 시즌 장 폴 골티에는 기괴한 분장과 엽기적인 공연으로 악명높은 미국의 록스타 마릴린 멘슨을 모티브로 삼아 핏빛 스커트를 남자 모델에게 입혔다. 투우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도 선보였다. 투우사들이 입는 짧은 가운처럼 어깨에 견장이 달린 데님 재킷이 대표 주자였다. 그가 즐겨쓰는 모티브인 바이커룩 또한 어김없이 등장했다.
밀라노 컬렉션의 ‘돌체 앤드 가바나’의 쇼에서도 야구 재킷 모자, 윈드서핑용 반바지나 품이 커서 활동하기 편한 카고 팬츠, 사파리 재킷 등이 선보였다. 돌체 앤드 가바나는 특히 2002 한일 월드컵에 발빠르게 대응한 신작을 내보였다. 16강전에서 탈락한 이탈리아팀에 용기를 주기 위해 이탈리아 국기 색상을 본떠 티셔츠와 신발 밑창에 초록, 빨강, 흰색 스트라이프를 사용한 것.
밀라노 컬렉션의 엠포리오 아르마니쇼에서는 아르마니 쇼 사상 최초로 남녀 모델이 무대 위에서 배구를 하는 모습이 연출됐다. 파리컬렉션의 카스텔바작은 복싱 글러브를 낀 아톰 등 만화 캐릭터가 새겨진 복싱복을 선보였다. 실제로 프로 복싱선수를 초빙해 링 모양의 무대 위에서 모델들과 권투를 하는 퍼포먼스식 패션쇼로 시선을 모으기도 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의 패션전문기자 수지 멘키스는 남성복 컬렉션에서의 스포츠 대세를 다른 각도에서 진단했다. “최근 수십년간 남성복은 캐주얼로 기울어져 갔다. 그러나 이제 정장과 스포츠웨어는 각각의 아이덴터티를 유지하며 새롭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
●오리엔탈 에스닉, 일본
![]() |
파리에 앞서 열린 밀라노 컬렉션에서는 동양적인 감성을 드러내는 의상이 대거 선보였다. 남성복에 있어서 밀라노 컬렉션은 실험적인 파리컬렉션에 비해 보다 실용적인 의상들이 선보이는 데다 톰 포드, 조르지오 아르마니, 랄프 로렌, 캘빈 클라인 등 거물급 디자이너들이 포진해 있어 더 주목 받는다.
‘우아미’의 대명사격이었던 발렌티노는 브랜드 최초로 품이 풍성한 ‘가라데 팬츠’를 디자인했고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일본의 전통의상인 기모노처럼 앞선을 서로 겹쳐 여미게 되어있는 ‘기모노 셔츠’를 선보였다. 아르마니는 중국, 인도의 민속의상에서도 아이디어를 얻었다. 중국의 인민복을 연상시키는 칼라가 높은 재킷이나 인도 남성들이 랩스커트처럼 둘러입는 ‘오버 스커트’를 변형해 선보이기도 했다. 미우미우와 프라다는 하와이와 일본의 영향을 받아 큰 꽃무늬 프린트 등을 모티브로 한 의상을 선보였다. 국내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남성복으로 파리쇼에 선 ‘솔리드 옴므’의 디자이너 우영미씨는 액세서리와 의상에 작은 한자를 새겨넣어 일본적으로도 또는 중국적으로도 읽히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구치의 디자이너 톰 포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그의 기모노풍 실크 드레스가 시선을 모았다. 톰 포드는 “이번 쇼에서 내 모델들의 컨셉트는 ‘매우 편안하지만 관능적인 일본의 아름다움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톰 포드의 일본에 대한 구애는 비즈니스적인 것으로도 해석된다. 톰 포드가 이브생로랑의 기성복 부문 디자인을 맡고난 후 도쿄 하라주쿠에는 초대형 이브생로랑 플래그 숍이 들어서 성황을 이루고 있다.
패션 평론가들은 동양에 주목한 디자이너들에 대해 “세계 경제의 불황,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테러에 대한 불안감 등이 동양 문화에서 느껴지는 ‘안정감(reassurance)’을 희구하게 했다”고 분석했다.
●스트라이프와 화이트의 약진
![]() |
밀라노와 파리 두 패션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은 스트라이프의 질주. 단색의 스트라이프가 아닌 각기 다른 색의 스트라이프의 조합이 인기였다는 것도 특징이다. 색상도 파랑 빨강 노랑 오렌지 등 채도가 높은 색들.
겐조는 진한 브라운에 베이지색 스트라이프를 넣은 정장에 흰색 넥타이를 매치하거나 가로무늬 스트라이프의 줄무늬가 배꼽선에서 서로 맞물리게 교차되는 니트웨어를 선보이기도 했다.
베르사체는 보라색의 가는 스트라이프가 검은색 바탕에 마치 오선지처럼 그려진 검은색 바지를 선보였다. 엉덩이 부분을 감싸주는 드로우즈형 수영복에조차 갈색과 검은 색이 교차되는 스트라이프를 내세웠다.
미우미우는 가장 많은 스트라이프 무늬를 내세운 디자이너 브랜드로 꼽힐 만하다. 팬츠며 셔츠, 니트에 주황, 빨강, 초록 등 여러 가지 색의 스트라이프가 교차됐다.
화이트 역시 대세로 떠올랐다. 그러나 9·11테러 사태에 충격을 받은 디자이너들이 지난해 뉴욕컬렉션에서 부랴부랴 쇼 직전까지 준비했던 컨셉트 컬러들을 내팽개치고 희생과 순수를 상징하는 흰색을 선택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맥락이다. 디자이너들은 활동성과 경쾌함이 대세를 이루게 될 내년 봄, 여름 의상을 보다 상쾌해 보이게 하는 포인트 칼라로 화이트를 선택했다.
장 폴 골티에는 그 대표주자. 특히 셔츠의 경우 특유의 기하학적인 패턴을 사용하면서도 화이트를 많이 썼다. 베르사체도 시스루의 흰색 레이스 블라우스에 꽃무늬를 나염하는 방식으로 화이트를 로맨티시즘과 결합했다. 요지 야마모트는 브이네크 상의의 네크라인과 밑단에만 선명한 블루를 넣은 화이트 니트를 흰색 슈트, 화이트 구두와 함께 매치했다. 배용준 등 우리나라 남자 연예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브랜드로 알려진 폴 스미스는 흰 셔츠와 스카이 블루색 팬츠, 화이트 셔츠를 결합하는 파스텔톤의 색감을 선보였다.
AP통신은 밀라노 패션쇼를 결산하며 내년 봄 여름 대비 남성복 추천 아이템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슈트: 더블 또는 싱글 무엇이든 좋음. 하지만 타이트하면 안됨. 조끼는 입어도 되고 안 입어도 되지만 슈트 색상과 동일하지 않은 색군으로 결정할 것. 바지의 허리선은 높고 밑단은 거의 접지 않음.
바지: 통이 넓은 카르고진이 가장 좋을 듯. 포켓이 많고 활동성이 좋은 면 또는 진 소재의 긴 바지가 좋음. 반바지나 무릎길이의 버뮤다는 좀 생각해 봐야 할 듯.
셔츠: 소매가 길수록 좋음. 큰
꽃무늬가 그려진 대담한 디자인도 OK.
넥타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입을 때는 폭이 좁은 것을, 클래식한 감각으로 입을 때는 폭이 넓은 것을 착용할 것.
도움말, 사진제공〓패션정보업체 모다뉴스(modanews) 조현옥 편집장, 이의진 이사
파리〓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실험적' 파리
![]() |
▽등산복을 컨셉트로 삼은 루이뷔통의 마크 제이콥스는 디자인 자체에 멋을 부리기보다는 스포티한 색감으로 디자인의 경쾌한 리듬을 살리는 수완을 발휘했다. 진한 오렌지색의 후드 잠바, 그 안에 입고 있는 보라색 라운드 셔츠 자체만 보면 다소 촌스러운 색상 조합같지만 블루와 퍼플의 중간색인 팬츠와 선명한 파란색이 도드라져 보이는 운동화를 코디네이션해 전체적으로 세련된 색감을 만들어냈다.
▽넓고 펑퍼짐해진 요지 야마모토의 슈트. 2∼3년 전 스니커즈에 골몰했던 것과는 사뭇 달리 그는 이번 시즌 슈트로 돌아왔다. 특히 긴 길이의 재킷이 주목받았다. 다른 디자이너들도 대부분 넉넉한 품의 슈트를 내놓았다. 야마모토가 추구한 것은 슈트의 ‘공식성’ 이 아니라 ‘휴식, 이완’의 이미지. 슈트 상의에 주섬주섬 자신의 소지품을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속 깊은 포켓이 여럿 달린 것도 편안함을 강조했다.
![]() |
▽장 폴 골티에 버전의 히피룩의 재생. 히피처럼 장발을 휘날리는 모델이 입은 티셔츠에는 그래피티 아트를 연상시키는 기법으로 골티에의 이니셜이 프린트됐다. 한국패션컬러센터 한영아이사는 “엄지발가락을 끼어 신는 슬리퍼와 스타킹, 셔츠, 팬티에서 모두 일장기를 연상시키는 선명한 레드를 사용한 점에서 일본적 요소도 묻어난다”며 “무릎 길이의 스타킹은 골티에 특유의 ‘코믹한 섹시함’을 잘 나타내는 소품”이라고 말했다.
▽화이트와 레드의 조화가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디자이너 헤디 슬리만 특유의 상큼한 색 감각을 엿보게 한다. 내년 봄, 여름색으로 부각된 올 화이트 셔츠와 팬츠에 온통 긴 빨간색 스카프를 두르기도 하고 벨트에 끼우기도 했다. 내년 이맘때면 다소 오트 쿠튀르적인 이 빨간색 스카프가 천 소재의 벨트 또는 짧은 남성용 실크 스카프로 변형돼 남성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듯.
▽일본 디자이너 겐조의 컬렉션에서 선보인 화이트 셔츠와 잿빛 팬츠의 코디네이션. 허리선 위까지 올라오는 복고풍의 하이 웨이스트 라인 팬츠이지만 품이 넓은데다 큼지막하고 귀여운 포켓이 달려 있어 대단히 스포티한 느낌을 준다. 하늘하늘하고 얇은 소재라 셔츠라기보다는 여성용 블라우스의 느낌을 주는 화이트 셔츠도 단추를 3개나 풀어 캐주얼한 느낌을 더했다. 허리선에 얇은 블랙벨트를 곁들여 허리선을 더 높아보이게 한 것이 포인트.
▼'실용적' 밀라노
![]() |
▽톰 포드가 내년 봄 여름을 겨냥해 내놓은 구치의 남성복들은 일본풍 일색이었다. 꽃, 나비, 새의 모티브를 자수한 잠바와 플라워 프린트의 기모노 가운 등 일본의 정서를 담은 작품이 대다수. 일본 아사히신문 패션전문기자 우에마 쓰네마사는 “지난해 초 톰 포드가 일본을 방문해 기모노를 잔뜩 사 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시즌을 위해 디자인할 당시 일본 여행의 영감이 대거 반영된 것 같다”고 해석했다.
▽내년 봄, 여름 남성복에서 주류를 이루게 될 화이트 컬러를 프라다도 대거 사용했다. 최근 하와이와 일본의 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디자이너 미우치우 프라다는 하와이 특유의 꽃목걸이를 변형한 듯 셔츠 앞선에 주름이 잡힌 장식을 달아놓아 남성 패션에서의 로맨티시즘을 창출해냈다. 허리에 두겹으로 느슨하게 두른 천벨트도 액세서리로 유행이 예견되는 아이템.
![]() |
▽디라인에 꼭 달라붙는 폭이 좁은 인디고 진과 가느다란 넥타이를 코디했다. 베르사체는 폭이 좁고 모던한 디자인의 넥타이를 캐주얼한 분위기의 의상과 매치하는 것이 내년 상반기 최대의 트렌디 룩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메탈 소재 액세서리도 2003년 봄, 여름 밀라노 남성복 컬렉션의 소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은색의 메탈로 체인 벨트, 반지, 목걸이 등을 착용해 화려한 느낌을 준다.
▽체인 벨트와 함께 내년 봄 여름 시즌 컬렉션에서 디테일적인 요소로 강하게 부각된 것이 지퍼다. 버버리의 고급 라인인 ‘버버리 프로섬’은 지퍼를 옷의 부속물이 아니라 디자인의 주요 모티브로 이용한 옷들을 선보였다. 베이지, 화이트, 브라운 등 내추럴한 색상의 코튼 팬츠와 탱크 톱에 커다란 지퍼를 달아 전체적으로 심플한 디자인에 경쾌한 변화를 주었다.
▽올 밀라노 남성복 컬렉션의 각종 프린트 가운데 가장 눈에 많이 띈 스트라이프 패턴을 멋스럽게 구사한 펜디. 상의는 심플한 블랙 테일러드 재킷에 라운드 셔츠를 곁들여 단아함을 강조한 반면 팬츠에 강렬한 스트라이프 패턴을 사용해 시선을 모았다. 화이트 팬츠에 블루와 블랙 스트라이프를 겹쳐 하체가 늘씬해 보이는 효과를 극대화했다.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