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감정사들의 세계 "보석 보기를 돌같이"

  • 입력 2002년 5월 16일 14시 42분


일요일인 12일 저녁, 보석 전문가 4인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하얏트호텔 1층 바쉐론 콘스탄틴 매장에 모였다. 7년에서 10년의 경력을 가진 이들은 ‘불가리’ 영업부 장성희 과장(32), ‘쇼메’ 숍 매니저 오미애 실장(39), ‘바쉐론 콘스탄틴’박성훈 부티크 매니저(33), ‘다사끼 지니아’ 김주연 디자이너(32).

보석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오른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다사끼 지니아' 김주연 디자이너, '바쉐론 콘스탄틴' 박성훈 부티크 매니저, '불가리' 장성희 과장, '쇼메' 숍 매니저 오미애 실장.

한편으로는 한국시장에 진출한 명품 주얼리 브랜드에서 일하는 ‘동종업계 경쟁자’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국제적인 공인 보석감정연구소 GIA(Gemological Institute of America의 약자)의 동문들이다.

●‘GI제인’만큼 혹독한 훈련 코스 GIA

“요즘은 ‘VVS’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아.”

“예전에는 보석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어선지 ‘VS’가 최고인 줄 알더니….”

“참 ‘FL’은 요즘 어때요?”

이들이 주고받는 암호같은 말들은 다이아몬드의 등급을 나타내는 용어들이었다. ‘FL(Flawless)’은 ‘흠집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티끌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한 상태의 최고급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는 말. 보석감정사 모임 이름이기도 하다. ‘VVS(Very Very Slightly included)’와 ‘VS(Very Slightly included)’는 ‘FL’ 아래 등급. 내포물이 얼마나 함유됐느냐에 따라 나뉘며 ‘VVS’가 ‘VS’보다 고급품이다.

오미애 매니저는 미국에서, 나머지 3명은 한국에서 모두 90년대 초중반에 GIA의 보석감정사 G.G(Graduate Gemologist)과정을 마쳤다.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세워진 GIA는 보석감정사 및 보석디자이너, 세공전문가 등을 길러내는 보석전문가 교육기관. GIA가 공인한 보석감정사가 되려면 최소 6개월의 교육과정을 거쳐야 한다.

GIA는 혹독한 훈련 방식으로 유명하다. 특히 출제된 문제 중 하나라도 틀리면 졸업할 수 없는 실기시험 ‘트웬티 스톤(Twenty Stone)’은 졸업생들 사이에 악명이 높다.

“2000여종에 달하는 다이아몬드와 유색 보석 가운데 20개의 원석 조각을 추려 놓고 이름을 맞추게 하는 겁니다. 졸업하고 수년이 지났지만 지금 떠올려봐도 소름이 끼쳐요.” (김주연 디자이너)

교육생들에게 이처럼 어려운 시험을 치르게 하는 이유는 등급에 따라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 차이가 날 수 있는 보석 감정에 한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정하기 전날에는 음주, 흡연을 삼가게 돼 있어요. 숙면을 취하는 것은 물론이고 눈에 잔상이 남을까 염려해서 텔레비전 시청까지 피하죠.”(박성훈 매니저)

장성희 과장은 보석 감정 의뢰가 들어오면 무조건 휴가 전후나 아픈 날, 우울한 날은 피한다. “몸과 마음의 리듬이 깨져 있으면 ‘맑은 눈의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다룰 때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실수’에 대한 안전망을 마련한다.

“투명도(clarity), 색상(color), 캐럿(carat), 컷(cut)을 가리키는 ‘4C’를 감정할 때 한 등급 정도씩 오차가 날 수 있어요. 그래서 감정사 5명이 한 팀을 이루는 경우가 많죠. 각자 감정한 뒤 최고 최저점을 버린 나머지를 평균해 평가를 내리는 거예요.”

●숨어서 일하는 사람들

명품 주얼리 브랜드에서 일하는 네 사람의 화제는 고객관리에서도 공통됐다. 명품 중에서도 단일 아이템으로는 최고가인 시계 보석류를 다루다보니 고객 마케팅도 ‘첩보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된다. 금기수칙도 있다. 첫째 반드시 고객의 휴대전화로 연락할 것, 둘째 허락 없이 우편물을 집으로 보내지 말 것.

가이드라인까지 설정된 가장 큰 이유는 가정불화를 막기 위해서다. 활짝 웃으며 다이아몬드 반지 목걸이 세트를 사 갔다가 다음날 얼굴에 멍이 든 상태로 찾아와 “남편이 당장 바꿔오라고 해서…”라며 환불을 통사정하던 주부, 하루는 애인과 다음날은 부인을 대동하고 나타나 똑같은 반지를 주문하는 바람둥이 남편 등 별의별 손님이 다 있기 때문이다.

직업이 특수하다보니 성격도 바뀐다.

“고급 주얼리 살롱이나 호텔 내 주얼리 숍은 소수의 고객들이 다른 손님과 마주치지 않도록 미리 약속을 한 뒤 방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루 한두 차례 정도밖에 사람 구경을 못하기도 해요. 이런 숍에서 일을 하다보면 교양은 늘고 말수는 줄기 마련이죠.”

카르티에에서 근무하다 최근 같은 리치몬트 코리아그룹 내 시계 전문 브랜드 ‘바쉐론 콘스탄틴’으로 옮긴 박성훈씨는 혼자 있는 시간이면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 모든 일간지의 기사를 훑어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정치 국제 문화 사회면 페이지까지 읽고 나면 매장에 갇혀 있어도 세상 일에 훤해지는 느낌이 들죠.” 박씨는 복잡한 각종 게이트의 주역들 계보도며 탈북자 길수군 가족의 정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이런 보석 주의하세요

“어떤 할머니가 60년간 고이 모셔온 반지를 싸들고 와서 감정을 의뢰한 적이 있어요. 안타깝게도 링 위에 박혀 있던 빨간 보석은 유리였죠.”

요즘에는 이처럼 평범한 돌을 보석으로 속여 파는 황당한 사기는 많이 줄어든 편. 하지만 무색 사파이어에 푸른색 코팅을 입히거나 루비에 열을 가해 최고급품인 선홍색으로 바꾸는 등 천연석인지 합성석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장난을 치는’ 사례는 더 많이 보고되고 있다.

“특히 중국 여행길에 터무니없이 싼 루비를 사면 안 돼요. 대부분 열처리한 저급한 보석이거든요.”(장성희 과장)

이들은 이 밖에도 큐빅 지르코니아, 유리 등 엇비슷한 생김의 유사품이 많은 다이아몬드의 경우 공인감정소가 발급한 감정서를 받은 제품만을 구입하라고 조언했다.

밤 깊은 줄 모르고 계속된 이들의 대화는 ‘돌이 보석이 되기 위한 조건’에 의견이 일치하면서야 마무리됐다.

“돌이 보석이 되려면 아름다워야 하고 강해야 하고 또 흔치 않아야 한다는 세 가지 요소를 충족시켜야 하죠.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갖춰야 하는 내적 조건과 동일하지 않나요?”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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