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세상은 우리가 사랑한 만큼 아름답다'

  • 동아일보
  • 입력 2001년 12월 28일 17시 50분


세상은 우리가 사랑한 만큼 아름답다/박범신 외 지음/239쪽 8000원 고려문화사
거나한 송년회 다음날 아침. 숙취에 졸린 눈으로 세면대 거울을 본다. 낯선 얼굴 하나. 누구시더라.
스스로 낯설어지는 찰나. 돌아보면 한 치 앞만 보며 쉼없이 달려온 생활 뿐. ‘리와인드’와 ‘플레이’가 단순 반복되는. 이젠 꿈이란 말조차 까마득하다. 치약 튜브처럼 조금씩, 조금씩 소진되는 삶. 남들도 나와 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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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작가 화가 등 17명은 이렇게 말한다. 월급쟁이보다 자유로워 보이는 이들에게도 현실은 각박하고 메마르다. 그것은 도시의 피로나 체불되는 월급 같은 것은 아니다.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듯한 마흔살(황주리)이기도 하고, 이뤄지지 못한 낭만의 꿈(곽재구)이기도 하다.
이 책은 ‘비움’에 대한 에세이다. 비워야 새로운 나를 만난다. 만남의 방법은 떠남이다. 그렇다고 비장해질 필요는 없다. 아주 떠남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므로. 잠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다.
히말라야 산맥으로(박범신), 호젓한 시골 강가로(장석주), 순천만의 갯마을로(곽재구), 호야나무가 반기는 서산 해미읍성으로(원재훈), 아니면 멀리 뉴욕으로(하재봉).
굳이 낯선 지명을 찾지 않아도 좋다. 실재했던 사랑의 전설(구효서)이거나, 어머니가 남긴 은수저의 추억(조양희)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들은 거기서 헛된 욕망을 게워낸다. 팽팽했던 끈을 툭, 놓았을 때의 편안함. 그러나 범인이 어찌 모든 욕망에 초탈하리.
“그래도 마음 어디엔가 욕망의 찌꺼기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안다. 모든 욕망은 불순하지만 욕망이 있으므로써 인간은 인간이다. 다만 그 욕망에 끌려가지 않으면 된다.”(하재봉)
그러나 비우려는 노력 속에 충만함이 깃든다. 그것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게하는 작은 행복이다. 그것은 “향기로운 영혼의 우물이 흘러 넘치는 길”이다. 그 길을 돌아오면, 세상은 우리가 사랑한 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자세를 곧추 세울 필요는 없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틈틈이 손가는데로 넘겨보면 그만이다. 깨달음은 벼락처럼 일순간 내릴 수도, 가랑비처럼 서서히 서서히 젖을 수도 있다. 버리기 위해 잠깐 동안의 부재를 선택했다면, 이 책마저 버려라.
미지의 먼곳, 혹은 추억의 한때에서 돌아와보라. 그리고 다음날 아침 거울 앞에 서라. 오래 잊고 있던 말간 얼굴이 나를 보고 있을 테니.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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