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21세기를 맞으며]더 깊이 보다 넓게 보자

  • 입력 2000년 12월 31일 17시 24분


지난 1년간의 새 천년 맞이를 뒤로 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2001년을 맞는다. 엄밀히 따지자면 21세기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것이지만 주변 여건의 악화로 인해 새 세기를 맞는 기대와 설레임보다는 불안과 우울함이 앞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연세대 박영신교수의 글을 통해 21세기를 어떻게 헤처나가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본다. <편집자>

떠들썩했던 새 천년의 한 해를 보내고 ‘다시’ 21세기를 맞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그리 밝지 않다. 만만치 않은 문제들 때문이다. 경제를 낭떠러지 끝으로 몰았던 위기를 해결했나 싶었는데 상황은 또 어려워지고 있다.

남북이 마침내 화해의 물꼬를 트면서 새로운 통합의 마당이 열리나 했지만, 지역 정치의 분열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교육도 문제 투성이고 기업도 그렇다. 심지어 종교조차 조소만 자아내고 있을 따름이다.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는가 했더니 후진국의 모습을 조금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온갖 부정과 부조리를 낳고 있다. 이것은 과도기에서 나타나는 단순한 혼란이 아니다. 찌든 병이 더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겪는 어려움이다.

어떤 이는 우리 사회에서 희망이란 찾을 수 없다며 이민 길에 오르고 있다. 그 길도 마땅찮은 이는 그냥 주저앉아 세상을 등진 채 조용히 연명하고자 한다. 또 어떤 이는 이 땅에서 살 바에야 우리 사회의 작동 원리를 익혀 세상 돌아가는 대로 매끄럽게 맞춰야 한다며 재주부리며 산다. 그러나 이같은 삶의 방식에서 우리는 어떤 내일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질병이 그렇게 해서 치유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와 맞닥뜨려 그 근본 원인을 파헤쳐 고쳐야 한다. 근본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흔히 현실성이 없다며 조롱거리로 여긴다. 표면에 드러나는 손쉬운 문제만을 골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문제를 걷어치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성’이 있는 대안이 아니다.

이른바 ‘공적 자금’을 퍼부어 문제를 해결하는 듯했지만 오늘에 와서 보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짓이었는가.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를 그대로 둔 채 돈을 퍼붓는다고 해서 실제로 해결되었는가.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부었지만 이내 물이 빠져버렸던 것이다. 전혀 현실성이 있는 해결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깨진 항아리를 먼저 손봐야 했다. 본질과 동떨어진 ‘현실성’은 허구이며 기만이다.

오늘 우리는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문제 밑의 보이지 않는 ‘깊은 문제’를 눈여겨볼 수 있어야 하며, 그 너머 ‘넓은 문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해 집단들이 내거는 갖가지 구호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엇갈리는 이해 관계를 넘어 더욱 큰 가치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아무런 원칙 없이, 그리고 어떤 높은 가치에 대한 헌신 없이 지역 발전의 균형을 이룬다며 주고받는 술수꾼들의 뒷거래질은 정치의 모범도 아닐 뿐더러 결코 근본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아무리 순간의 이해 관계라 하더라도 그 테두리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더 높고 넓은 가치의 산등성이 앞에서 우리 모두의 왜소함을 느끼며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우리가 함께 오를 수 있을 때, 비로소 좁다란 이해 관계의 뭉치는 깨질 수 있다. 이 점에서 새 출발은 지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는 결의이며 결단이다.

아직도 우리는 미봉책을 일삼고 있다. 뼛속까지 들어와 썩고 있는 것을 도려내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의 치유가 불가능하다. 현실성이 없다고 내동댕이치는 바로 그 근본의 문제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곧 현실성 넘치는 첫걸음이다.

박영신(연세대 인문학부 교수·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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