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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1월 21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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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거세던 지난해 어느
겨울날. 조심스럽게
언덕길을 내려오던 집배원
오토바이가 ‘꽈당’ 눈길
위로 미끄러졌다.
넘어져 무릎을 만지며
고통스러워하던 집배원이
헬멧을 쓴 채 길바닥에
흩어진 소포와 편지들을
주워 담았다. 다시 시동을
걸고 출발하기 직전,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정강이에서 피가 흐르고….
주부 집배원 신명숙씨(41)에게
겨울은 정말 녹록한
상대가 아니다.
겨울만 되면 가방이 세 배로
무거워지고 걸핏하면
눈길에 자빠지기 일쑤니
그럴 수밖에….
주부 집배원 신명숙씨
매년 겨울만 되면 우편물이 늘어나 업무량이 폭주한다. 최근 E메일로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을 보내는 젊은이들이 늘고 경기불황의 여파로 연말 광고우편물이나 기업홍보물도 예전만 못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일에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가 배달하는 소식을 기다릴 사람들을 생각하면 매일 바삐 움직여야 하는 것. 그래도 그가 7년째 이 일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할 때 집배원도 그 기쁨을 나눠 갖기 때문이다. 그의 겨울은 그래서 늘 따뜻하고 풍성하다.
카드-연하장 폭주 바쁜나날
▽집배원은 나의 천직〓그가 집배원 생활을 시작한 것은 93년 봄. 두 아이와 함께 책방에 들렀다가 우연히 체신청에서 집배원 모집공고를 낸 것을 보고 뛰어들게 됐다. 물론 시작할 때 주위의 만류는 대단했다.
남편은 “애가 둘이나 딸린 여자가 할 일이 못된다”며 말렸다. 그의 우체국 입성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남편뿐이 아니었다. 여직원이 팀에 배정될 경우 업무분담이 늘어나게 되는 동료직원들의 눈길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발령이후 첫 1주일에 승부를 걸었어요. 못타는 자전거를 배우느라 엉덩이가 벌겋게 부어올랐고, 주택가를 헤매느라 발도 부르텄어요. 하지만 우편물 배달을 나간 첫날, 미국에서 온 아들의 편지를 받아든 칠순 할머니의 미소를 보고 저는 알아버렸어요. 집배원이 제 천직인 것을….”
하루 100여명 직접 만나
▽‘오토바이를 탄 마당발’〓올해로 6년째 서울 양천구 목동 아파트단지를 맡고 있는 그는 이 동네에서 오토바이를 탄 마당발로 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기간 단지를 돌다 수만가구의 주민들을 직접 만나기 때문이다.
우편함이 생기고 나서부터 접촉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등기우편은 직접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 100여명 정도는 만난다. 그 바람에 어떤 주민들은 “구의원에 출마해보라”고 권유하기도 하지만 관심 밖의 이야기.
털장갑 건네준 그 소녀 못잊어
▽정이 넘치는 세상〓그에게는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몇 해 전 겨울. 눈이 많이 오던 날 장갑이 눈에 젖어 ‘호호’ 불며 우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조그만 여자아이가 다가와 아무런 말도 없이 털실장갑을 건넸고 그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아이는 눈 속으로 뛰어가버렸다. 그는 그 여자아이가 건네준 장갑에서 세상의 따뜻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의 직업예찬은 오늘도 계속된다.
<박정훈기자>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