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곳에 사는가]아치울마을 '이화에 월백하고…' 배경

  • 입력 2000년 10월 1일 18시 34분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고려말 이조년(1269∼1343)이 쓴 유명한 시조의 첫 구절이다. 이 시조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아치울 마을이다. 시조의 이화(梨花)는 배꽃. 지금도 먹골배 산지로 유명한 이 곳이 고려말에도 배로 유명했다.

아치울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강원도나 함경도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아차산성이 세워진 것도 이 때문. 그 아래쪽으로 삼국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됐다.

지금의 아치울 모습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 이 마을과 워커힐호텔 사이에 군부대가 생기면서 정부가 그 곳에 살던 주민들을 아치울 윗마을로 이주시킨 것이다. 이주단지인 셈이었다. 집 지을 돈이 없던 이주민 일부가 땅을 팔고 외지로 나갔고, 그 뒤를 이어 문화예술인들이 조용한 이 곳을 찾아 모여들기 시작했다.

81년 이이화씨가 이 곳에 자리를 잡은 이래 줄잡아 20∼30명의 문화 예술인들이 아치울로 옮겨왔다. 소설가 박완서, 조각가 김미경 신영식, 서양화가 이성자, 판화가 최치숙, 한복디자이너 허영, 전 미술협회장 이두식씨 등도 이 곳 주민들이다. 법의학자 황적준 박사와 세계적 과학자인 조장희 박사 등 저명한 학자들도 아치울에 터를 잡았다. 작고한 서양화가 하인두씨도 80년대 초 이 곳에 들어온 초기 멤버였다.아랫마을과 윗마을로 이뤄져 있으며 문화 예술인들은 주로 산과 가까운 윗마을에 모여 산다. 마을은 모두 100여 가구 남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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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값은 마을 내에서도 판이하다. 보통 평당 400만∼500만원선이며 계곡 주변은 평당 700만∼800만원도 호가한다. 구리시는 아치울을 ‘문화마을’로 가꿀 계획이다.

◇이이화씨와 떠나는 인근 '역사여행'

이이화씨는 23일 아치울 주민들과 함께 동구릉을 다녀왔다. 그는 이 곳 주민들과 주말마다 인근 역사유적지 탐방에 나선다. 동네 예술인과 문인들, 원주민 등 숫자에 관계없이 모이는 대로 유적지를 찾아 떠난다. 소설가 박완서씨도 단골 멤버. 역사연구가답게 그는 가는 곳마다 유적 설명을 도맡아 한다.

아치울에서는 유적지를 찾아 멀리 떠날 필요가 없다. 마을이 유적지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아차산성〓아치울에서 한 걸음에 내닫는 곳이다. 해발 285m 아차산 정상에 오르면 한강과 중랑천, 왕숙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차산 능선의 마지막 봉우리에 고구려인의 기상이 서린 아차산성이 있다. 고구려 유적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성벽구조를 갖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정벌할 때(475년) 백제 개로왕을 사로잡은 곳으로 1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이이화씨는 “아차산성 일대는 석곽고분, 덮개석 등 고대 석실 고분이 널려 있는 고대사의 보고”라고 설명한다.

▽대성암〓아차산성에서 조금 내려오면 신라 문무왕 때 의상조사에 의해 창건된 대성암이 있다. 원래 이름은 범굴사였다. 대성암 동쪽의 삼층석탑은 백제 양식을 지닌 고려시대 석탑이다.

▽제3보루성과 바위산 고분〓보루성은 남한에서 처음 발견된 고구려 성곽이다. 건물지, 유물, 철재수리소 등 다양한 내부구조를 갖고 있다. 아차산성 위쪽에 있는 바위산고분은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바위산 꼭대기에 고분이 들어서 있어 특이하다.

▽망우리 독립투사 묘역〓망우리 공동묘지 내에 있다. 한용운 조봉암 장덕수 등 민족운동가들의 묘역이다. 자녀들과 함께 가면 교육적인 면에서 좋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

▽동구릉〓아치울에서 46번 국도를 타고 교문사거리를 지나면 왼쪽에 9개의 릉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도 이 곳에 있다. 아치울에서 한강 건너 맞은편에는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역사탐방객을 기다린다.

<구리〓이은우기자>lib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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