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가족/"핏줄3代, 얼굴만 닮았구나"

  • 입력 2000년 8월 18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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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김원일/문이당/전2권 각290쪽내외 8,000원▽

"1대(代)가 집안을 일으키면 2대는 정치를 한다며 가산을 소진한다. 3대째는 예술에 손을 대면서 집안에 낙조(落照)가 찾아든다."

정확치는 않은 인용문이다. 문학사 시간에 독일작가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일가’를 소개하며 교수가 얼핏 언급한 말이었던가.

작가 김원일(58)의 새 장편 ‘가족’(문이당) 역시 무(無)에서 출발, 집안을 일으킨 1대와 쇠락해가는 2,3대 가족의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작가는 IMF외환위기 직후에서 새 밀레니엄의 전야에 이르는 한 시대 한국사회의 총체상(總體像)을 세밀화로 펼쳐낸다.

토마스 만에게 유럽 상업자본과 시민사회의 성장과 몰락이 문제였다면, 김원일에게는 후기자본주의의 고도화와 함께 점차 다양화 다층화하는 가치, 가족을 포함한 개인간의 거리, 의사소통의 단절이 문제가 된다.

작가는 평양 출신 실향민인 김석현을 이야기의 근원에 등장시킨다. 딸 둘을 북에 남겨둔채 부인과 아들만을 데리고 월남한 그는 특유의 근면으로 냉면집 ‘죽원면옥’을 열어 부를 쌓는다. 그러나 아들 김치효 내외는 일에 열정을 잃고 지배인에게 가게를 세놓은지 몇해.

3대째인 1남3녀의 모습은 시대에 적응 또는 도태되어가는 다양한 인간군을 그려낸다. 장남 김용규는 미국으로 이주, 벤처사업가로 성공의 길을 걷는다. 차남 김시규는 잇단 장애아의 출생과 아내의 죽음을 겪으면서 아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마약의 유혹에 빠진다. 운동권 출신인 딸 김선결은 장애아를 위한 복지시설을 운영 중.

형제들의 끝자리에 탐미적 인물인 김준이 있다. 커피점 주인으로 계획성없는 삶을 살지만 문학 미술 음악에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그의 꿈은 ‘세기말 파리의 예술’이라는 책을 써내는 것. 그를 사랑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한사코 거리를 두는 지방대 교수 노주희와의 관계가 스토리 진행에 적당한 리듬감을 부여한다.

그런대로 흘러가던 이들의 삶에 IMF사태는 크고 작은 균열을 가져온다. 선결의 복지시설에는 지원금이 끊기고, 집안의 어머니인 장여사는 정신적 위기를 타고 발흥한 사이비 교단에 목돈을 바친다. 세를 주었던 냉면집은 문을 닫는다. 할아버지 김석현의 돌연한 죽음까지 겹쳐 집안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러나 작품의 결말은 비극적이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 혹 중단되고 혹 이어져가는 개개인의 삶이 있을 뿐. 밀레니엄의 마지막날, 김준이 자연친화적 삶을 이어나가는 마을 ‘한티버든’으로 향하면서 작품은 끝난다.

혹 작가는 문명에 대립되는 자연을 새 밀레니엄이 요구하는 삶의 규준으로 제시하는 걸까. 그러나 김준의 마음속에는 ‘한티버든에 안주 못할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 장애인 민한세와의 사랑을 꽃피운 김선결의 선택이 또다른 모델일까. 작가는 한사코 독자가 나름대로의 그림을 이어가도록 유도한다.

좌표 없이 이어지는 세계속에서 주인공들은, 독자는 무엇을 표적으로 삶을 이어갈까. 그 숙고 뒤에는 독자 자신의 삶이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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