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하는 고도 경주]아파트에 포위당한 '김유신장군'

  • 입력 2000년 7월 3일 19시 08분


고도(古都)에 고도(古都)가 사라지고 있다. 1000년 이상된 찬란한 문화유적은 삭막한 시멘트 문화로 뒤덮이고 있다. 경주 부여 등 적어도 한 밀레니엄 이상을 버텨온 우리의 고도가 새 밀레니엄 초 역사 앞에 신음하는 현장을 찾아 본다.<편집자>

“약 5분 후 이 열차는 경주에 도착하겠습니다.”

열차가 경북 경주 외곽에 진입할 즈음, 객실에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 몸을 추스려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온통 아파트뿐. 천년 고도(古都) 경주에 대한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다. 실망을 잠시 접어두고 경주 시내를 걷는다.

그러나 대릉원 고분군이나 첨성대 주변을 제외하곤 신라의 수도였다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1996∼98년 경부고속전철 경주 도심 통과를 놓고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경주. 고도의 모습이 사라지고 문화유적이 파괴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경주는 이제 더 이상 고도가 아니다.

▽로마, 교토(京都), 시안(西安), 그리고 경주〓이탈리아의 로마나 일본의 교토, 중국의 시안 등 세계적인 고도는 예외없이 도심에 아파트나 고층 건물을 짓지 않는다.

유적 보존을 위해 고층건물은 모두 도시 외곽에 있다. 문화국가라는 한국만 유적도시 한복판에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다.

▽아파트에 갇힌 김유신장군〓현재 경주 시내엔 466개동의 아파트(총 2만7500여 세대)가 들어서 있다. 시내 한복판 용강동의 용강동고분. 신라 토우가 발굴됐던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그러나 바로 옆은 온통 아파트 숲이다. 골프 연습장도 있다. 동천동 우방아파트는 신라 가옥구조를 보여주는 중요 유적이 발굴됐는데도 무참히 훼손하고 들어선 건물이다.

황성동 주공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제철 유적 위에 세워졌다. 건너편 형산강변의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 바로 앞은 고층아파트가 가로 막고 있다.

경주의 한 시민은 “아파트 숲이 밀물처럼 밀려와 소중한 유적을 뒤덮고 있는 실정”이라고 걱정한다.

아파트 뿐만 아니다. 용장리엔 국적불명의 건축물 10여채가 들어섰고 공사가 한창이다.

▽제2의 풍납토성, 경주〓1990년대 아파트 건설을 시작으로 경주의 개발은 그치지 않고 있다.

경주 남산 동북쪽에서 약 2㎞ 떨어진 동방동 10만여평에선 대규모의 택지조성이 진행되고 있다.

지표조사나 발굴도 하지 않은채 산의 능선을 절개해 15m나 파내려갔다. 유적은 이미 파괴됐다.

경주시청 관계자는 “별다른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경주 도심은 유적 아닌 곳이 없다.

경주 선도산 자락에도 3∼5층짜리 건물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다. 경마장 건설과 황룡사 전시관 신축 계획 역시 유적 훼손이다.

건축 붐은 끝없는 개발을 유발하고 문화재 파괴로 이어진다.

10년후쯤, 경주는 서울의 풍납토성으로 변해 이를 놓고 한바탕 소모적인 논란을 벌여야 할 판이다.

▽사라지는 천년고도 경주〓“경주에서 고도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누가 경주를 찾을 것인가.” 지방자치단체에 경주의 보존을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나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고도 보존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고도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강우방 국립경주박물관장은 “경주는 한국의 전통 문화가 완성된 곳이다. 경주는 고도의 모습을 갖췄을 때만 존재 의미가 있다. 경주는 지금 벼랑에 몰려있다. 더 이상 미루면 경주는 끝이다.”라고 말했다.

<경주〓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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