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藥' 실태점검]약효 떨어진 약 "골탕만"

  • 입력 2000년 6월 2일 19시 34분


주부 강모씨(44)는 최근 약을 잘못 먹어 콩팥 기능이 떨어진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강씨는 올해 초 이같은 진단을 받은 뒤부터 매주 세번 병원에서 4∼5시간씩 혈액을 투석하고 있다. 강씨는 한달 전 쉬 피로감을 느껴 처음 병원에 갔다.

의사는 혹시 복용하는 약이 있느냐고 물었다. 강씨는 그 당시 약국에서 사서 먹고 있던 관절염 약봉지를 꺼내 보였다. 의사는 “약에 진통제가 세알 있는데 원래 진통제는 한알만 복용하게끔 돼 있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진통제를 너무 많이 복용해 콩팥 기능이 나빠졌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A병원 내과 과장으로 근무하다 쉬고 있는 의사 반모씨(46)는 예전에 진료했던 고혈압 환자로부터 전화를 잇따라 받고 있다. 그는 환자들에게 혈압약 카포낙을 처방하고 다른 병원에 가서라도 이 약을 사먹으라고 일러줬지만 환자들이 혈압이 조절되지 않는다고 전화를 해온 것이다. 반씨가 확인해본 결과 다른 병원에선 값이 싼 카피(복제) 약을 처방해주고 있었다. 반씨는 단골약국에 연락해 과거 진료했던 환자들에게 ‘약효가 있는 약’을 구해줬다.

국민이 약효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약 때문에 골탕을 먹고 있다. 약효가 떨어지는 값싼 원료의 약 때문에 병원에 왔을 때 3, 4일 만에 나을 환자가 보름 이상 고생하기도 하고 약 남용의 부작용으로 콩팥 위장 간 등에 질환이 생기기도 한다.

서울 강남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문모씨(42)는 “진통제의 효과에 자신이 없어 여러 종류를 함께 투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이 올해 2월 서울시내 47개 약국을 대상으로 감기약 실태를 조사한 결과 29곳에서 해열진통제와 소염진통제를 복합 투여하고 있었다.

지난해 서울YMCA 시민중계실과 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가 서울시내 의원과 약국 150곳씩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약국의 45.3%, 의원의 12.1%가 진통소염제를 2가지 이상 쓰고 있었으며 4가지를 한꺼번에 투여하는 곳도 있었다.

의대 교과서는 진통제는 한가지만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며 효과가 없을 때 다른 진통제로 바꿔야 한다고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서울 송파구의 한 의사는 “병원 경영주와 약국에선 값싼 진통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결국 약효가 낮아 양을 많이 쓰다보면 부작용만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국민이 세계 최고의 항생제 내성을 갖고 있는 배경에는 이처럼 약효가 떨어지는 값싼 약이 도사리고 있어 약의 남용을 피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 제약회사 관계자는 “항생제는 ‘1차’가 듣지 않으면 ‘2차’, 2차가 듣지 않으면 ‘3차’의 순으로 써야 하지만 값싼 약의 가격경쟁 때문에 1차 약의 가격이 뚝 떨어져 제약업체가 생산을 그만둔 경우가 많다”면서 “따라서 많은 국민이 정확한 검사도 없이 처음부터 값비싼 약을 먹게 된다”고 말했다.

H대 병원 황모교수(44)는 “환자를 치료하다보면 2차 항생제 중에도 잘 듣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병원 내 약 심의회를 열어 똑같은 성분의 다른 약으로 바꾸어 투여하면 신기하게 환자의 병이 좋아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현행 의료시스템은 약효보다 가격경쟁력만 강한 값싼 약의 유통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다.

의사 반씨는 “동네병원에서 품질이 좋고 값비싼 약을 쓰면 의료보험연합회의 심사가 들어온다”면서 “보험수가가 삭감당하고 다른 불이익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약효가 좋은 약보다는 값싼 약을 쓰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배경에다 오리지널 약보다 10배나 싼 카피 약을 구입하면 병원 약국에서 높은 수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좋은 약을 골라 쓸 필요가 없어진다.

약효가 낮고 값싼 약이 판치는데도 국민은 약에 대한 정보가 없어 선택의 권한이 없다. 1990년대 초 미국 시카고에서 아기를 낳은 약사 이모씨(40)는 “의사의 처방을 받고 종합비타민제를 사러 약국에 갔을 때 약사가 오리지널 약과 카피 약의 차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는 것을 보고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또 약을 약효의 등급에 따라 분류해 설명해 놓은 ‘오렌지북’을 인터넷 상에 올려놓아 의사 약사는 물론 일반 국민도 약을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성주기자>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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