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사회의 새좌표]심리학/"인간은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 입력 2000년 4월 17일 19시 08분


“과학이란 결코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는 현상을 단지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근사치로 표현할 뿐이다.”

이런 과학 패러다임의 변화는 바로 19세기 말에 ‘마인드의 과학’을 표방하면서 출발했던 심리학의 변화이기도 하다. 물리학적 연구 방법을 이용하여 인간 마인드를 탐구하고자 했던 심리학은 인과론적 사고와 합리적 이성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시대 산물이었다. 따라서 ‘이성의 시대에서 감성의 시대로 전환’하는 21세기 초, 심리학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 과학적 지식이 유용하게 활용됐듯이 인간 마인드에 관한 과학적 지식은 인간의 생활 문제와 사회 변화에 직접 활용됐다. ‘이성적 인간’이라는 가정은 인간이 스스로를 기계와 같이 분석 가능하고 개량 가능한 대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심리학은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듯이 정신 문제를 해결하고 종자를 개량하듯이 양육과 교육을 통해 인간의 마인드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했다.

▼사이버 공간의 이미지 교감▼

이런 노력들은 기술의 진보와 함께 컴퓨터와 같은 기계에 인간의 사고나 행동 특성을 접목시키려는 수준으로 발전됐다. 자동인식 시스템이나 논리 추론기계 같은 지능형 시스템의 설계 뿐 아니라 뇌 활동의 분석을 통해 인간의 마인드를 찾으려는 신경과학의 노력이나 인공지능의 연구도 모두 심리학이 추구했던 마인드, 즉 이성적 사고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심리학의 눈부신 성공은 이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첫 번째 도전은 바로 인간을 기계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보는 과학 패러다임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다. 새로운 과학 패러다임에 기초한 인간관은 합리적이고 논리적 사고의 특성보다는 환경 맥락 속에서 성장 변화하는 유기체적 속성을 강조한다. 특히 인간의 마인드는 어떤 고정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어나는 ‘맥락’(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인식론적 입장이 강하게 부각됐다. 이는 인간 행동의 기저에는 논리적 결론을 추구하는 이성적 사고보다 느껴지고 해석되는 감성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보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인지, 정서, 감성, 감성지능, 감성 이미지 그리고 감성 마케팅 등의 개념이 새로운 연구 주제가 등장했다.

인간의 속성을 이성보다 감성에서 찾고자 하는 현상은 사이버 공간의 속성과 절묘하게 일치한다. 이것이 바로 심리학이 직면한 두번째 도전이다. 이제 심리학은 ‘현실 공간과 완전히 다른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 행동과 사고 과정’에 관한 낯선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직접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현실 공간이 이성적 토대를 의미한다면, 이미지로 상호작용 하는 사이버 공간은 감성적 축이다.

이제 행동을 평가하고 변화시키며 인간의 정신 건강을 향상시키려 했던 이전의 많은 연구와 그 결과들은 완전히 다른 맥락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사이버 학습’, ‘사이버 중독증’, 또는 ‘이용자 중심의 사이버 공간의 설계’와 같은 현실 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성에서 감성의 시대로▼

이성적 토대에서 출발한 현실이 이미지에 기초한 사이버 공간으로 급격하게 재구성되는 시대 변화는 바로 인간 마인드를 구체적인 실체로 가정했던 심리학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을 이성적 측면 뿐 아니라 감성적 차원을 통해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버공간을 통해 인간은 현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인식하며 또 새로운 인간관계도 맺는다. 채팅이나 대화방 등의 활동은 바로 이미지로 이루어진 가상적 교류가 구체적 경험이 되는 현상이다.

사이버공간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조작하거나 타인의 이미지를 직접 경험함에 따라 인간은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게 됐다. 가상적인 자기와 현실보다 더 생생한 심리 경험을 사이버 공간 속에서 창조하는 일도 시도되고 있다. 현실공간과 사이버공간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심리학이 직면한 도전은 “어떤 속성의 공간에서든 인간이 잘 적응하며 생활할 수 있는 사고와 행동의 틀이 무엇이며 또 이것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 도전은 사이버 공간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고 사이버 공간의 경험을 현실 공간에서 체험할 수 있는 연결점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성을 토대로 하고 감성의 축을 가진 마인드를 찾는 21세기 심리학의 정체를 재규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황상민(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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