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키드'의 24시]사랑도 우정도 온라인서 배운다

  • 입력 2000년 3월 10일 19시 21분


중학교 2학년 박모군(14)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켠다. 박군이 요즘 즐기는 사이버 게임은 ‘단군의 땅’. ID는 유리마마, 레벨은 48(만점은 99) 수준. 사이버공간에서 그의 직업은 의사. 나이는 20세다. 여자친구 ‘아침이슬’도 있다.

유리마마는 ‘오늘은 반드시 사령관을 죽이리라’ 결심한다. 여러번 전투를 치르고 마침내 도착한 사령관의 천막앞. 그의 직업은 의사여서 공격력이 별로 없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본다. 마음을 가다듬고 (컴퓨터앞에서 진짜) 호흡을 고른다. 드디어 사령관과의 결전. 아무래도 정신력이 모자란다. 체력에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정신력 점수를 올려놓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순간 아침이슬이 나타났다. 너무 반가워 ‘진짜’ 눈물이 났다.

▼하루 4~5시간 게임▼

아침이슬은 레벨이 60인 여전사. 유리마마와 아침이슬은 힘을 합쳐 사령관을 무찔렀다. 승리의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 오른다. 두사람은 결혼을 약속했다. 단군의 땅에서 결혼을 하려면 신선에게 1000만냥을 줘야 한다. 현재 두사람이 가진 돈은 300만냥. 열심히 돈을 벌어(레벨을 올려) 결혼자금을 마련할 계획이다.

박군이 게임에 매달려 있는 시간은 하루 4∼5시간. 밥먹는 시간을 빼고는 공부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한달 전화료가 17만원이 나와 엄마의 닦달이 이만저만 아니지만 맞벌이 부모는 아들의 컴퓨터게임을 별로 막는 분위기가 아니다.

친구들도 만나지 않는다. 1주일에 한번 신촌 햄버거집에서 이뤄지는 단군의 땅 게임자 동호인 모임이 그의 유일한 오프라인 접촉이다. 이 모임에는 20대후반 형에서부터 초등학생 동생뻘까지 있다. 나이와 직업은 상관없다. 게임얘기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누는 온라인 전투경험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된다.

첫만남 때 서로 통성명했지만 모두 ID를 부른다. 그러다 보니 황당한 일도 생긴다. 한번은 모임에 늦어 약속장소로 전화를 걸었는데 ‘참새등짝’ ‘미친개’ ‘아사녀’ 등 ID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전화를 끊어야 했다.

▼가상세계-현실 혼동▼

박군은 이처럼 온라인 생활과 오프라인 생활이 혼동될 때가 있다. 게임을 하다 감정이 복받친 적도 있고 게임에서 돈을 벌면 진짜 부자가 된 것 같다. 게임하다 목이 마르면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목이 마르다’고 쓰고 온라인상에서 물을 마신다. 레벨이 높아져 약자를 도울 때는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똘똘 뭉쳐지고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레벨이 높아갈수록 강자에게 약자의 생사여탈권이 주어져 게임세상의 신(神)이 된다.

이것은 오프라인으로까지 이어져 동호인모임에서는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게임자의 레벨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 동호인모임에서 레벨이 높은 사람은 거의 존경의 대상이 된다.

박군과 같은 사이버키드들은 바깥세상에서 친구관계와 학교생활의 경험 및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고 익혀야 할 사랑 우정 헌신 배신 미움 리더십 협력정신 같은 것을 온라인 세상에서 배운다. 굳이 책을 읽거나 학급의 친구들과 놀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온라인 세상이 오프라인보다 훨씬 박진감이 넘친다. 그리고 체질에도 맞다.

▼동호인모임 유일한 외출▼

그러면 학교에도 별로 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아 한번 물어보았다. 박군은 “학교에선 별로 배울 게 없어요. 온라인에 들어가면 무엇이든 다 있고 더 재미있어요. 어른들이 다니라 하고 일단 대학을 나와야 직업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갈 뿐이에요”라고 심드렁하게 말한다.

사이버키드들이 오프라인 세상에서 맺는 인간관계는 온라인처럼 일회적이고 찰나적이다. 박군은 “게임에서 만난 이성친구가 오프라인에서도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컴퓨터 게임자처럼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바꿔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만났다 헤어지는 것에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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