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감격했던 나는 모처럼 지도교수와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었을 때 이 책을 읽은 일이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고교생 때 읽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남들은 고교생 때 읽는 책을 서른이 다 돼서야 읽었다는 사실은 분명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고교생 때 한 번 읽어치우는 책이라는 듯한 교수의 말에 나는 못마땅했다. 이 책은 결코 고교생 때 한 번 읽고 치워버리는 만만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을 굳이 꽃에 비유한다면 이 책은 향기로운 야생화에 해당하는 책이다. 더구나 생태계의 훼손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오늘 우리는 진정으로 이 책을 통해 자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그 후 나는 줄리언 헉슬리의 ‘계시없는 종교’와 칼 세이건의 ‘에덴의 용들’을 감동깊게 읽었다. 저명한 과학사상가였던 헉슬리의 ‘계시없는 종교’는 과학과 종교에 대한 내 신념에 새로운 불을 지펴준 책이며,‘에덴의 용들’은 우주 속에 전개된 생명과 지능형성의 역사를 독특한 필치를 통해 실감있게 보여주는 책이었다.
최근에는 칼 세이건의 전(前)부인 린 마구리스와 그의 아들 도리스가 함께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출간됐고, 번역본 또한 나와 있다. 가히 생명에 대한 이해를 한 차원 높여준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이란 저자와 독자 사이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특히 자연과학 책의 의미는 독자의 관심과 이해수준이 결정한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란다우와 립시츠가 쓴 ‘역학’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고전역학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 시기 내 관심사와 이해수준이 이 책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책읽기는 단순히 좋은 책을 찾기보다는 ‘내게 좋은 책’을 찾는 지혜가 더욱 소중하다.
장회익〈서울대교수·물리학〉